캔터베리에서 만난 뜻밖의 천사들

아일랜드와 영국에서 두 달

by서해



바야흐로 캔터베리다.

학창 시절, 세계사 과목 시험에서 "중세 유럽 슬롯를 비추는 거울이며, 근대 영어 확립에 지대한 공을 세운 제프리 초서의 작품은?" 하며 출제되곤 했던 《캔터베리 이야기》 배경 도시. 나는 이름만 알던 캔터베리를 천천히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에 사흘이나 머물기로 작정했다. 스투어강 펀팅, 대성당 방문, 굿즈 셰드(The Goods Shed)에서 늦은 아침 먹기 같은 소소한 일들을 계획했다.



Mercery Lane 골목을 빠져나오면 나타나는 작은 광장 Butter Market Square, 그 뒤로 캔터베리 대성당 입구가 보인다.


스투어(Stour) 강에서 펀팅(Punting)부터 하러 부리나케 달려갔다. 이건 가이드가 바닥이 평평한 나무배를 긴 장대로 밀며 좁은 수로를 오르내리는 놀이다. 쉬운 영어로 들려주는 올드타운 역사를 귓등으로 들으며, 새소리 가득한 강변 풀밭을 살피는 재미가 으뜸이다. 입술 파란 달개비가 그늘을 쪼아 먹는가 하면 왼쪽 방향을 고집하는 나팔꽃이 여름을 친친 감아올렸다. 클라이맥스는 웨스트게이트 근처 강물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알루비아(Alluvia)를 만난 순간이었다.


알루비아는 캔터베리 출신 조각가인 제이슨 디케어스 테일러(Jason deCaires Taylor)가 2008년에 강물 속에 설치한 여인의 조각상이다. 셰익스피어 《햄릿》 속 오필리아를 그린 밀레이(Millais)의 그림을 오마주했다고 한다. 스투어강의 낮은 수심, 맑은 강물 아래 꽃무늬 드레스를 입고 잠든 듯 누워있는 조각상. 물속 여인은 아름답고 우아했다. 또 어찌나 서늘하던지. 나는 다리 위로 올라와서까지 한참을 내려다보다가 햄릿처럼 말했다. "내 영혼아, 조용히 앉아있자."



John Everett Millais의 오필리아(1852), 세익스피어 <햄릿>의 '오필리아'는 원래 캔터베리 스투어 강의 익사 사고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있다.


알루비아는 단순히 동상을 물에 빠뜨린 것이 아니라, 계절과 수량 변화, 이끼나 수초의 생장이 작품에 스며들도록 설계했다. 밤에는 조각상 내부 LED조명이 켜져 신비로운 빛이 난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자 어떤 생각이 피어올랐다. 수초와 모래에 덮여 천천히 시간과 동화되는 조각상이야말로 캔터베리의 진짜 얼굴이라는. 눈 감은 알루비아의 머릿결을 촘촘한 햇빛이 빗질하기 시작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이런 순간이 있다. 어떤 장소, 어떤 물건 앞에서 지금껏 몰랐던 감정이 밀려오는 순간들. 그럴 때면 감춰져 있던 또 다른 내가 문득 고개를 내밀며 '이게 바로 너야' 하고 말을 건네는 듯해 어리둥절해지곤 한다.


웨스트게이트 주차장으로 향했다. 아침에 빈자리를 찾다가 진출입로 쪽에 겨우 한 곳을 발견했다. 옆 차가 주차선을 살짝 넘아와 있었는데, 뭐 이 정도야,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대신 너무 붙지 않도록 간격을 띄우는 바람에 내 차가 구획선 밖으로 삐져나왔던 터였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앞 유리창에 노란 주차위반 딱지가 꽂혀 있었다. 위반항목은 "Parked Beyond The Bay Markings". 여기선 주차공간을 Bay라고 한다. 조치사항은 과태료 50파운드. 마침 지나던 세인즈버리 배송기사가 24시간 이내 중복 발부는 없으니 비싼 주차료 낸 셈 치고, 다른 일 보는 게 나을 거라며 위로(?)해 줬다.



Parking Bay(주차구역), Loading Bay(적재구역), Bus Bay(버스정차대), Disabled Bay(장애인주차) 처럼 주정차구역을 영국에선 Bay라고 한다.


그날 저녁 나는 호텔 Wi-Fi로 낑낑대며 카운티 도로교통국 사이트에 접속했다. 과태료 따윈 당장 내버리자는 게 내 성질이니까. 우여곡절 끝에 티켓 번호, 차량 번호, 신용카드 번호를 넣고 엔터키를 누르자 "Systems Not Available. Please Try Again."이라는 메시지만 반복됐다. 그냥 놔두면 나중에 과태료에 렌터카 회사 수수료, 연체료까지 덤터기 쓸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캔터베리 시청사로 차를 몰았다. 누구라도 만나 직접 담판 지을 생각이었다.


화이트프라이어 몰 1층 시청사에 도착했다. 리셉션엔 백발 할머니가 미소로 맞았다.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여기서 직접 돈을 받진 않아요. 하지만 물어볼게요" 하면서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가슴에 붙은 마거릿(Margarette)이라는 이름 끝에 t자가 두 개였다. 나는 속으로 'F라도 부족할 판에 T가 둘이라니'하고 중얼거렸다. 그녀는 어젯밤 사이트가 불통이었다는 내 사정까지 시시콜콜 얘기하더니, 전화기를 넘겨주었다. 저쪽에서 직접 통화하고 싶어 한다면서. 전화기 속 담당자는 지금이라도 휴대폰으로 납부해 보라며 어젯밤과 똑같은 절차를 길게 설명해 줬다. 하지만 그곳에선 인터넷이 도통 잡히지 않는 게 문제였다.


엄중하게 닫힌 시청사 건물 1층엔 예상 밖의 천사 Magarette 할머니가 있다.


그러자 전화기 속 목소리가 제안했다. 자기가 직접 접속해서 내 카드로 처리해 보겠다며. 나는 옳다구나 하고 차량 번호며, 카드 번호를 불러줬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끝내버리고 싶던 마음과, 상황이 참 기묘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이 동시에 교차했다. 잠시 후 여전히 마지막 단계가 묶인 걸 확인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마거릿이 전화를 돌려받아 몇 마디를 주고받더니만 담당자 말을 내게 그대로 옮겨줬다. "이거 캔슬할게요. 주차위반 티켓은 찢어버리세요."


갑자기 날씨가 쨍하고 갰다. 캔터베리는 은혜가 충만한 곳, 기독교가 처음 잉글랜드에 전래된 축복의 도시다웠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대성당을 찾았다. 성당은 명성에 비해 크기가 작았지만 내 마음은 풍요로웠다. 서기 597년 성 오거스틴이 영국에 기독교를 처음 들여온 곳, 그 후 토마스 베켓 대주교의 순교지, 지금은 영국 성공회의 본산으로 손꼽힌다. 대성당 밖으로 나왔다.



제1차 대전에서 희생된 켄트지역 말 800만 마리를 추모하는 Canterbury War Horse가 성당 앞에 있다. 나는 성인의 유해를 보는 것 보다 더 안타까웠다.


종교라는 묵직한 이름보다 신 앞에 자신을 내려놓은 소박한 사람들의 흔적을 나는 더 좋아한다. 그 고요 속을 가만히 서성이다 작은 동상 하나를 발견했다. 버게이트(Burgate) 거리, 세인트 메리 막달렌(St. Mary Magdalene) 정원에 놓인 실물 크기 청동 조각상이었다. 이 조각상은 거리 쪽에서 바라보면 지친 나그네가 앉아 있는 모습이고, 반대편에서 보면 날개를 단 천사 모습이다. "낯선 이들에게 친절하라, 그들은 변장한 천사일지도 모른다."라고 말한 W.B. 예이츠가 생각났다. 오전에 시청사에서 어떻게든 나를 도와주려던 마거릿 할머니가 떠올라 한참을 그 옆에 머무르며 여행의 거친 결을 쓰다듬었다.



캐나다 조각가 Timothy Schmalz가 히브리서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사실 영국은 자동차 여행이 여러모로 불편한 나라다. 오른쪽 운전석은 당황스럽고, 라운드어바웃은 낯설다. 마차가 다니던 좁은 길을 여전히 사용해 어떤 곳은 차를 한 쪽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여 비껴가야 할 정도다. 숙소는 낡고 고만고만해 구글맵은 자주 엉뚱한 곳으로 데려간다. 주차장은 드물고, 고속도로 휴게소도 두 시간 넘으면 요금을 문다. 그래도 두 달이나 여행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사람들의 '배려' 덕분이지 않았을까. 그들은 여행자에게 양보하고, 또 도움의 손을 내밀어주었다. 어김없이 마주치는 미소와 예상치 못했던 재미. 아마도 나는 또다시 자동차 여행을 떠날 것이다.



"여행은 내가 짠 일정표를 확인하러 가는 길에 있지 않다. 여행은 길을 잃거나 계획을 빗겨 나간 자리에서 마주친 뜻밖의 바람, 뜻밖의 눈빛에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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