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와 영국에서 두 달
"어떤 여행은 집으로 돌아온 뒤에 시작된다."
알랭드보통은 막상 여행 중에는 감각의 홍수 속에서 미처 깨닫지 못했다가 일상으로 돌아온 후에야 강렬하게 또 수수께끼처럼 다가오는 여행을 꼬집어 이렇게 말했다. 내게 북잉글랜드 린디스판(Lindisfarne)이 그랬다. 린디스판은 영국 중북부 노섬벌랜드(Northumberland) 지역 해안에 있는 조수섬(tidal island)이다. 아무리 가려워도 손 닿지 않는 등짝 어느 구석처럼 강원도 후미진 바다에 숨은 작은 섬이랄까. 그렇다고 하기엔 바이킹이 처음 나타난 땅, 달이 뜨면 모이는 석조 교회, 그리고 웅숭깊은 이야기가 남아 있는 곳이다.
사건은 1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때는 793년 6월 8일 토요일,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새벽. 도끼와 칼로 무장한 150여 명의 사내들이 평평한 밑바닥에 용머리를 장식한 길고 날렵한 배(Long Ship) 세 척을 나눠 타고 린디스판을 습격했다. 당시 린디스판 수도원은 노섬브리아 왕국의 영적 고향이었다. 귀족들이 바친 황금 십자가, 은으로 만든 성배, 보석으로 장식한 성경 '린디스판 복음서' 따위 보물이 가득했다.
반나절 만에 섬은 초토화됐다. 저항하던 수도사들은 현장에서 살해되고 바다에 던져졌다. 건물은 불타고 가축은 빼앗겼으며, 노예로 쓸만한 젊은 수도사와 아이들은 밧줄에 묶인 채 끌려갔다. 당시 섬에는 고위직 수도사 40명과 그들의 농사를 돕고 가축을 기르던 평민, 장인, 그리고 성 커스버트(St. Cuthbert) 유해를 보러 온 순례자와 그 가족들까지 모두 200여 명이 머물렀다. 유럽을 뒤흔든 '바이킹 시대'가 바야흐로 시작된 것이었다. 매년 영국에서 열리는 '아내 업고 달리기'가 린디스판 습격에서 유래됐을 정도라니까.
나는 이 이야기를 삼십 년 전 에든버러에서 처음 들었다. 일요일 교회에서 만난 L은 캘트교회를 들려주다가 린디스판을 언급했다. 신학 공부를 하던 그는 북쪽 캘트교회와 남쪽 로마가톨릭으로 나뉘는 초기 영국 기독교 흐름에 나름 정통했다. 호기심 많던 나는 '뭐지?'하고 갸우뚱거리다가 기어코 린디스판이 뉴캐슬 못 미쳐 있는 섬이란 걸 알았다. 그땐 찾아가 볼 엄두를 내진 못했다. 이번에 사흘을 밤버러(Bamburgh)에서 묵는데, 물 만나면 덧나는 오래된 상처처럼 린디스판이 다시 기억의 수면 위로 솟아올랐다.
오후 4시, 둑길(Causeway)이 열렸다. 북해 바다를 생선 배 따듯 허옇게 가르는 5km짜리 둑길은 물때에 맞춰 아침, 저녁 두 번 통행을 허락한다. 앞장선 갈매기를 따라 찰랑이는 바닷물에 네 바퀴를 밀어 넣었다. 10분이 넘도록 달려 차 한 대가 겨우 통과하는 좁은 다리를 지나서야 뭍에 닿았다. 바퀴가 제대로 흙을 밟는 순간, 눈앞을 가로막는 통나무 차단기. 이제부턴 온전히 두 발로 걸어서 마을로 들어오라 요구한다.
나는 늘 Causeway라는 단어의 정체가 궁금했다. 북아일랜드 '자이언트 코즈웨이', 홍콩 '코즈웨이 베이', 미국 뉴올리안즈의 '폰차트레인호 코즈웨이'를 다녀왔지만, '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솟아오른 둑길'이란 설명만으론 석연찮았다. 내가 아는 Cause는 '사상', '이념'이란 뜻이 아니던가. 거기에 Way가 붙었으니 '대의명분'으로 똘똘 뭉친 비장한 결의가 더 숨어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기어코 나는 Lindisfarne Causeway를 '린디스판이란 신념에 이르는 길'이라고 해석하고 말았다. 신념이란 모름지기 바닷물 같은 외부 시련에 잠기기 일쑤고, 또 속절없이 맨바닥을 내보이기도 하는 법이라고 중얼거리면서.
처음 갈 곳은 린디스판 캐슬이다. 남서쪽 모퉁이 작은 마을을 금세 지나쳤다. 이제부턴 모래언덕, 진흙땅, 습지로 둘러싸인 까만 머리 토종 양떼(Scotish Blackface)의 방목지다. 바다와 목초지 사잇길을 20분은 걸어야 캐슬에 도착한다. 여긴 16세기 스코틀랜드와 국경을 놓고 싸울 때 지은 방어용 성이다. 그 후 방치됐다가 지금은 내셔널 트러스트가 관리하고 있다. 반쯤 무너지고, 반쯤 잡초에 덮인 캐슬은 나이 들어 누구나 하나씩 가슴속에 간직한 폐허를 닮았다. 나는 종일 바닷가에 나와 그 마음을 내어 말리고 싶었다.
본래 섬이란 풍문 같은 존재다. 그런데 여긴 더하다. 하루 두 번 시간이 갇히고, 오직 걸어서 다녀야만 하고, 또 외지인과 말 섞기를 꺼리는 주민들이 살고 있다. 문 닫은 우체국 앞에 건초더미를 실은 짐차가 한대 서 있었는데, 남자 둘이 내게 눈길을 주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자신들끼리 대화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고 미소나 인사를 보내온다고 해서 내가 길을 물어볼 것도 아니었건만. 그래도 왠지 끌리는 미지의 섬. 린디스판으로 들어가는 여행은 어쩌면, 풍문을 찾아 떠나는 순례와 모험 사이의 것일지도 모른다.
다음은 린디스판 수도원이다. Lindisfarne Priory라고 쓰는데, 이건 Abbey보다 작은 규모를 말한다. 캘틱 수도원은 예수를 따라 12명을 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분화했기 때문이란다. 바이킹의 습격이 계속되자 875년, 수도사들은 자신들이 가장 경외하는 수도원장 성 커스버트(St.Cuthbert) 유해를 들고 섬을 탈출했다. 그후 120년간 방랑을 거듭하다 995년에야 잉글랜드 내륙, 위어(Wear)강 언덕에 성인의 유해를 묻고 소박한 예배당을 지었다. 그게 더럼 대성당(Durham Cathedral)의 기원이 됐다.
습격 당시 린디스판 수도원장은 하이크발드 주교(Higbald Bishop)였다. 그는 바이킹의 학살 속에서도 운 좋게 살아남아, 그날의 참상을 린디스판출신 대학자 알쿠인(Alcuin)에게 낱낱이 편지로 알렸다. 노예(Thrall)로 끌려간 수도사들은 라틴어를 읽고 쓸 줄 안다는 이유로 바이킹의 교역문건을 만들거나 인질의 몸값을 흥정하는 일에 동원됐다. 그중 몇몇은 바이킹 군주의 참모, 외교관, 심지어 스칸디나비아의 기독교화를 이끈 인물로 거듭났다. 넷플릭스 드라마 <바이킹스> 속 '아델스탄'(Athelstan)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 린디스판에 남은 건 수도원 잔해와 그 사이를 누비는 소금기 밴 바람뿐. 잔해 앞 얕은 바닷속에 손바닥만 한 성커스버트 아일랜드가 있다. 성인이 찬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기도하던 땅이다. 종교든 뭐든 육체의 한계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다 마침내 깨달음을 얻는 수행자들은 언제나 놀랍다. 이런 풍경은 오래도록 선명한 기억으로 새겨질 것임을 알기에 나는 잠시 숙연해졌다.
마지막은 '린디스판 미드'(Mead)다. 미드란 '벌꿀로 만든 술'을 말한다. 서기 634년 St.Aidan은 하느님을 섬기며 영혼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 린디스판 수도원을 지었다. 그들은 차가운 북해 바람을 견디며 기도할 힘을 얻고자 벌꿀주를 만들어 마셨다. 수도사들의 레시피는 바람과 파도에 흩어졌으나 1968년 마을 광장옆 St.Aidan's Winery가 린디스판 미드를 재현해 냈다. 나도 시음에 나섰다. 드라이 앤 스위트 알코올 한 모금에 온몸이 따뜻해졌다. 알랭드보통이 다시 나타났다.
"무너져 내린 것들은 아름답다. 제 몸을 다 살아내고 스스로 허물어져 가는 것들 앞에서는 비장함마저 사라지고 고요함이 남는다. 우리들 마음속의 성채도 마침내 저렇게 바위와 잡초로 돌아갈 것이다. 그것은 슬픔이 아니라, 마침내 도달한 평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