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 누가 영국에서 가장 감동적인 폐허를 묻는다면?

아일랜드와 영국에서 두 달

by서해



영국에서 가장 쓸쓸하고 장엄하여 가슴을 울릴 만큼 아름다운 '감동적인 폐허'를 딱 하나만 고르라면?

늦여름의 뉘엿한 햇살 아래 처음 휘트비와 마주한 순간, 나는 직감했다. 김영하 작가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딱 한 장의 사진 때문이다. 마음속에 불꽃을 지르고, 결국 집 밖으로 끌어내는 TV광고 속 한 장면"이라고 말한 그 불꽃이 다름 아닌 이곳에서 피어올랐음을.



연못에 비친 수도원 반영(reflection)을 담는 것이 "최고"라고 알려져 있는데, 소문에 비해 사람들은 드물었다.


실제로 잉글리시 헤리티지는 영국의 1800개 유산 중에서 휘트비 수도원 폐허를 '가장 감동적이고 또 압도적'(the most moving and overwhelming)이라고 꼽았다. 이유는 '인간이 저지른 파괴'가 '시간이 조각한 예술'로 완벽하게 승화됐기 때문이라고. 나는 이 말의 웅숭깊은 무게를 수도원 마당에 서기 전까진 헤아리지 못했다.


영국엔 유독 지붕을 잃은 수도원이 많다. 그게 다 헨리 8세 때문이다. 그는 왕자를 얻기 위해 앤불린(Anne Boleyn)과 재혼하려 했으나 교황이 승인해주지 않자 로마가톨릭과 단절을 선언했다. 이후 1536년부터 5년간 잉글랜드와 웨일스 전역에 번성하던 가톨릭 수도원 800여 개를 몰수하고 무자비하게 파괴했다.



수도원은 어스름이 내려앉고 폭풍우가 치면 진면목을 드러낸다. 시간의 물너울 속에 감춰둔 상처와 아픈 기억이 하나둘 깨어나기 때문이다.


휘트비(Whitby)는 '하얀 마을'이란 뜻이다. 처음 이곳에 도착한 바이킹이 석회암 절벽을 보고 '하얗다'(whit)라고 외친 첫마디와 '마을'(by)이란 뒷말이 합쳐졌다. 정확히는 '휘트비'라고 쓰고, '윗비'라고 발음한다. 이때 숨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얼른 목구멍을 닫아야 한다. 왜냐하면 '휘-' 소리는 199개 계단을 숨 가쁘게 달려온 비바람이 맡은 일이기 때문이다. '윗비'라고 속삭이면 '퓌이휘히잇-' 하고 바람이 제 거친 숨결을 보태 '휘트비'라고 완성한다.


생김새는 '영국의 허리'라 불리는 노스요크셔 해안에 붙은 집게 모양이다. 두 개의 클리프 사이에 좁고 깊은 에스크(Esk) 강이 흐른다. 클리프 한쪽에 수도원과 옹색한 올드타운, 맞은편에는 항구와 외줄기 도로가 납작 엎드려 있다. 잉글랜드 남부 사람들이 브라이튼으로 휴가를 많이 떠난다면, 잉글랜드 북부 사람들이 주로 찾는 곳이 여기다. 교통도 수월찮아 요크에 묵으며 당일치기를 한다. 그래서인지 서양인 행색이 대부분이었다.



867년 휘트비를 침략한 천여 명의 바이킹 연합군은 74년 전 린디스판을 습격한 '치고 빠지는 무리'가 아니었다. 이들은 아예 마을을 차지하고 붉은 뿌리를 내린 정복자들이었다.


한 시쯤 마을 외곽, 색슨빌(Saxonville) 호텔에 도착했다. 여기는 3대째 내려오는 가족호텔이다. 소문대로 여든이 넘은 '헤서 뉴턴'(Heather Newton) 여사가 오랜만에 보는 친척 할머니처럼 맞아주었다. 그녀는 날더러 호텔 주차장 걱정 따윈 접어두고, 당장 차를 빼 휘트비 수도원부터 다녀오라고 권했다. 걸어가려면 거리가 제법 되는 데다 계단과 경사진 언덕길뿐이라며.


나는 룸키를 할머니에게 도로 맡기고 차를 돌렸다. 그녀는 6시부터 무료인 주차장을 일러주며, 수도원 구경을 마치고 항구로 내려오면 꼭 피시앤칩스를 먹으라고 당부했다. 알려준 대로 시가지를 빙 돌아 10분 남짓 운전해 Abbey Farm에 도착했다. 여름 동안 캠핑장으로 운영하는 이곳은 주차비는 하루 종일 5파운드로 저렴하고, 수도원까진 걸어서 5분이 채 안 됐다.



햇볕이 아낌없이 쏟아지는 양지바른 언덕을 망자들에게 양보한 휘트비 사람들은 오늘도 죽음을 올려다보며 삶을 이어간다.


수도원은 장엄했다. 북해 파도가 울부짖는 60미터 절벽 끝에 홀로 서 있는 모습은 위치만으로도 가슴을 시리게 했다. 지붕과 벽은 세월에 다 내어주고, 창틀과 기둥은 뼈대만 남았다. 그 빈 공간으로 '윌리엄 터너'가 그린 두툼한 질감의 하늘과 한 입 베어 먹고 싶은 구름, 모호한 수평선이 제 집처럼 들락거렸다. '건축이 자신을 비워 자연에게 자리를 내준' 모습이었다. 해풍은 어김없이 불어와 가슴을 저미는데, 그 통증이 단지 길 위에서 쌓인 피로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금세 깨달았다.


휘트비 수도원은 서기 657년에 세워졌다. 영국이 7개 왕국으로 쪼개져 있던 시절, 노섬브리아의 오스위(Oswiu) 왕과 성녀 힐다(St.Hilda)가 만들었다. 이웃 왕국 머시아(Mercia)의 침략을 물리친 후 서울 시청앞 광장의 2.5배나 되는 땅에 수도원을 짓고, 딸 앨프레다를 맡겨 수녀로 키웠다. 왕의 각별한 관심과 수도원장 힐다의 헌신으로 한때 수도사들이 200여 명에 이를 만큼 학문과 영성의 성지로 번성했다.



휘트비 사람들은 해질녘이면 언덕으로 이어진 199개 계단을 올라 죽은 자들과 함께 바다 너머 까마득한 곳을 바라보며 하루를 정리한다.


664년에는 그 유명한 휘트비 시노드(Synod)가 여기서 열렸다. 시노드란 '종교회의'란 뜻이다. 브리튼섬 북쪽의 스코틀랜드 켈트족은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이때 기독교란 다 가톨릭이다. 로마가톨릭이 캔터베리에 어거스틴을 보내기 훨씬 전부터였다. 북쪽 켈트기독교와 남쪽 로마가톨릭은 조금 달랐다. 특히 부활절 날짜와 수도사의 머리 모양(Tonsure)이 도마 위에 올랐다. 휘트비 시노드는 린디스판이 이끌던 켈트기독교 대신 유럽대륙을 등에 업은 로마가톨릭의 손을 들어줬다. 힘센 편에 선 덕에 수도원은 부쩍 몸집이 불었다.


잘 나가던 휘트비 수도원에도 몰락이 찾아왔다. 처음은 바이킹이었다. 867년, 천여 명의 바이킹 연합군이 들이닥쳐 수도원을 무참히 약탈하고 불태웠다. 이들은 요크(York)까지 함락하고, 요르빅왕국(Kingdom of Jórvík)을 세워 87년간 영국 중북부를 지배했다. 휘트비는 바이킹이 스칸디나비아로부터 가져온 모피, 호박, 상아를 부리고, 잉글랜드에서 뺏은 곡물, 직물, 은화, 포로들을 실어 나르는 상하역지로 번잡해졌다.



성녀 힐다(St. Hilda)는 노섬브리아 왕족 출신으로 휘트비 수도원을 짓고 초대 원장에 올랐으며, 664년 휘트비 시노드를 개최하고 회의 전반을 주재했다.


그동안 수도원은 폐허로 내팽개쳐졌다. 지붕을 잃고 앙상한 뼈대만 남은 절벽 위 수도원은 북해의 거친 해무를 뚫고 스칸디나비아와 요크를 오가는 바이킹 롱쉽들에게 '여기가 에스크 강 하구다'라고 말해주는 침묵의 이정표로만 버텨냈다. 그 후 200년쯤 지나 베네딕토 수도회에 의해 고딕 양식으로 얼추 제 모습을 찾았으나 16세기 헨리 8세의 '수도원 해체령'(Dissolution of the Monasteries)이란 또 다른 시련을 비켜서진 못했다.


가톨릭과 대립한 헨리 8세는 서슬이 퍼렜다. 특히 막대한 재산을 가진 휘트비 수도원을 콕 집어 겨냥했다. 가장 값나가던 지붕의 납(Lead)을 상판째 뜯어내고, 웅장한 청동 종과 고풍스러운 목재 가구, 반듯한 석자재까지 모조리 실어내 헐값에 팔아 치웠다. 지붕을 잃은 수도원은 순식간에 생기를 잃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땐 독일 해군의 함포 사격으로 몇 안 남은 기둥마저 꺾였다.



작가 이병률은 "바카라 속을 거닐 때는 거대한 세상이 내 안으로 들어오고, 길 위를 걸을 때는 작아진 내가 거대한 세상 속으로 스며든다." 고 썼다.


그 서글픈 잔해 위로 해가 비스듬히 물러앉았다. 사람들은 무너진 기둥에 걸터앉아 바카라을 펴 들었다. 영국을 다니다 보면 이렇듯 바카라을 든 이들을 자주 마주치는데, 신기하게도 유독 여성이 많았다. 시장조사기관<YouGov>의 통계를 찾아보니 과연 그랬다. 영국에서 매일 바카라을 읽는 여성(27%)은 남성(13%)보다 두 배나 많았다. 하긴 내가 아는 영국 남자들은 죄다 축구장에 있거나 아니면 동네 펍에서 맥주만 마셨다.


독서와 여행은 서로를 빼닮았다. 여행지에서 바카라장을 펴는 순간, 우리는 두 개의 세계를 동시에 거닐기 시작한다. 《보물섬》을 쓴 로버트 L.스티븐슨은 "길을 걷다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면 5파운드 금화를 줍는 것처럼 기쁘다."라고 했다. 하지만 내게는 천 년 폐허 속, 스러진 기둥에 걸터앉아 조용히 바카라장을 넘기는 사람들이 어떤 금화나 문장보다 아름답게 다가왔다.



태양은 지붕이 없는 데도 수도원 안으로 함부로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멀찌감치 바깥에 서서 기둥과 아치의 그림자들만 깊이 밀어 넣었다.


만약 수도원이 건재하다면 더 감동적이었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붕이 번듯한 건물은 '현재'만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지붕이 사라지고 벽이 허물어진 수도원은 '지난날의 영광과 오늘의 소멸'을 동시에 증명해 주었다. 눈을 감자 사라진 것들이 또렷하게 보였다. 허물어진 아치 위로 솟아오른 웅장한 돔 지붕과 텅 빈 창틀을 채운 형형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어디선가 수녀들이 읊조리는 기도가 들렸다. 뒤이은 발걸음 소리에 놀라 눈을 뜨니 문 닫을 시간을 알려주러 온 관리인이었다. 나는 함부로 벗어놓은 그림자를 수습했다. 그러니까 나는 폐허가 된 수도원 한가운데서 스스로 완성해 낸 극적이고 아련한 환영에 넋을 잃고 말았던 것이었다. 때마침 성 메리교회에서 종소리가 흩어져 나왔다. 사람들은 읽던 바카라을 덮고, 하나둘 내려갈 채비를 시작했다.



바이킹의 린디스판 습격은 '단순 약탈'로 시작되었다면, 바이킹의 휘트비 침략은 '지배 정착'으로 전환된 분기점이었다.


길어질 대로 길어진 그림자들이 무너진 벽 뒤에서 서로를 어루만졌다. 나는 엘리스가 빠졌던 토끼굴에 들어갔다가 간신히 되돌아 나온 기분이 됐다.


구글맵에 Cliff St.Car Park을 치고 항구로 내려왔다. '헤서' 할머니 말대로 6시부터 무료였다. 맥파이 카페(Magpie Cafe)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긴 줄이 늘어선 곳이 바로 눈앞에 나타났으니까. 이름에 Cafe가 붙었지만 커피가 아니라 피시앤칩스를 판다. 메뉴판은 볼 것도 없이 'Hadduck and Chips', 사이즈는 '라지', 음료는 '콜라'다. 잊지 말 것은 Cod보다 Hadduck이 더 고소하다는 사실.


맥파이에서 파는 해덕은 명실상부, 영국 최고다. 매일 아침 휘트비 항구로 들어오는 가장 신선한 생물만 쓰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한 끗은 반죽이다. 빵가루를 묻히는 Breaded 방식이 아니라 차가운 탄산수로 기포 가득한 반죽을 만들어 생선에 얇게 입히는 Battered 방식을 고수한다. 이 배터(Batter)라는 말은 덩어리 지지 않도록 주걱을 세차게 휘젓는(Beat) 모습에서 유래했다. 여기에 식용유 대신 소기름(Beef Dripping)으로 튀겨내어 깊은 풍미를 더한다.



Magpie(까치)라는 상호는 까치의 깃털처럼 건물이 검은색과 흰색 목재로 지어져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해덕 역시 대구과 생선인데 Cod보다 크기가 작고 감칠맛이 깊다. 영국에서 진정한 피시앤칩스를 맛보려면, 그곳이 매일 아침 생물이 들어오는 바닷가 항구인지부터 살펴야 한다.


영국에서 피시앤칩스는 영혼의 음식이다. 전쟁 중에도 유일하게 통제되지 않았다. 식량부족을 겪던 당시 영국정부는 빵, 고기, 버터를 엄격하게 배급했다. 하지만 피시앤칩스만큼은 예외였다. 밤낮 없는 공습에 지친 국민들을 달래기 위해 이것만큼은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했다. 전쟁터로 떠나기 전, 청년들에게 피시앤칩스는 단순한 생선튀김이 아니라 살아 돌아와야 할 고향의 온기이자 삶의 이유였을 게다. 나도 이걸 먹고 나니 거리 사람들이 죄다 낯익어 보였다.



휘트비 수도원 유적을 배경으로, 흡혈귀 망토를 입은 사람들이 소설 <드라큘라> 출간 125주년을 기념하는 축제를 펼치고 있다.


내일 아침은 성 메리교회부터 찾을 생각이다. 거긴 17세기 신분에 따라 교회 의자를 구분한 박스 피우(Box Pew)가 남아있다. 브람 스토커의 소설 <드라큘라>를 만든 199개 계단과 81번 공동묘지도 그대로다. 항구 언덕에는 호주와 뉴질랜드를 발견한 제임스쿡 선장의 고래뼈도 있다. 피시앤칩스 줄에서 만난 Mr.어쿼트(Urquhart)는 스코틀랜드계 호주인이었는데, 쿡 선장 흔적을 보러 왔다고 해서 내심 놀랐다.


어두워지자 바람이 불었다. 창공을 가르던 갈매기가 노을 끝으로 한번 크게 휘어졌다. 셀 수없이 많은 상념이 파도에 몸을 부대꼈다. 지난 기억들이 떠올랐다. 어느새 나는 많은 여행을 했다. 언제부턴가는 '어떻게 하면 다른 여행을 할지' 고민하게 됐다. 그러는 사이 깨달았다. 나는 짧고 빠른 여행을 즐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행을 하면서 낯선 공간과 그곳의 삶에 흠뻑 젖으려니 더 느린 시간이 필요해졌다. 거미도 짧게 있으려면 집을 짓지 않는 법이라니까.


"무너진 성벽 위로 해가 질 때, 비로소 나는 알게 되었다.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선 거미도 결코 집을 지을 수 없음을. 내가 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낯선 유적지의 시간 속 고요야말로, 내가 가장 찾고 싶었던 안식처였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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