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비울 밭에 물을 주며

어쩌다 텃밭! 19

by혜솔

텃밭에 도착하자 잎 사이에 숨어 있던 작두콩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 저렇게 자랐을까. 손바닥보다 훨씬 큰 꼬투리가 묵직하게 매달려 있다. 많이 달리지는 않았지만 서운하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그 안의 콩알이 차오르기를 기다리면 된다. 기다릴 것이 있다는 건 아직 밭에 올 이유가 남아 있다는 뜻이니까.


배추도 제법 잎을 펼쳤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벌레들이 먼저 맛을 본 모양이다.


“내 배추가 맛있기는 한가 보네.”


혼잣말을 하며 잎을 들춰본다. 이웃 밭의 배추는 반듯하고 푸르게 자라 내 배추와 자꾸 비교가 된다. 그래도 벌레와 나눠 먹으며 자란 배추에는 반듯한 배추가 모르는 시간이 들어 있을 것이다. 올해는 그 시간을 먹는 셈 치기로 한다.


밭 저쪽에서는 고양이 한 마리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지난번에 뱀을 잡았던 바로 그 아이다. 그날 이후 고양이가 달리 보인다. 작은 몸으로 이 밭의 어느 구석을 지키며 살아가는지, 오늘도 한참 거리를 둔 채 내 일을 지켜본다. 서로 아는 체는 하지 않아도 같은 밭을 드나드는 사이가 되었다.

고개를 들자 하늘이 높고 맑다. 추석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달력보다 먼저 알려주는 하늘이다. 대추나무에는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렸고, 호박은 누가 가져다 놓은 복덩이처럼 밭바닥에 둥글게 몸을 눕히고 있다. 한여름의 뜨거움을 견딘 것들이 저마다 가을의 모양을 갖춰가는 중이다.


추석 연휴에는 캠핑을 가야 해서 며칠 동안 밭에 오지 못한다. 작두콩은 그사이 알을 채울 것이고, 벌레들은 배추 잎에 또 작은 길을 낼 것이다. 호박은 조금 더 단단해지고 대추는 가을빛을 더 머금을지도 모른다.


떠나기 전, 호스를 길게 끌어 밭에 물을 흠뻑 준다. 흙이 물을 받아들이며 검게 젖어간다. 며칠 곁을 비우는 미안함을 물로 대신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다.


잘 있어.


말 대신 물을 오래 뿌린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밭의 시간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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