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텃밭! 20
가을 텃밭에서 가장 바쁜 것은 배추인 줄 알았다. 하루가 다르게 잎을 키우고, 넓게 펼쳤던 잎들을 안으로 모으며 제법 배추다운 모양을 갖추어 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번 주 텃밭에 가보니 배추보다 더 바쁜 것은 나였다. 배추벌레를 잡느라 허리를 펼 틈이 없었다.
처음에는 배추가 참 기특했다. 심을 때만 해도 손바닥만 하던 모종이 어느새 두 팔을 벌린 듯 잎을 펼치더니, 이제는 가운데부터 오글오글 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연둣빛 속잎이 겹겹이 포개지는 모습이 어찌나 예쁜지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예쁜 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잎 사이로 무언가 꿈틀거렸다. 배추벌레였다. 한 마리를 잡아내고 다른 배추를 들여다보니 거기에도 한 마리, 또 다른 배추에도 한 마리. 녀석들은 어쩌면 그렇게 좋은 자리만 골라 앉아 있는지. 바깥의 질긴 잎은 마다하고 부드러운 속잎을 차지하고 있었다.
"얘들아, 너희도 맛있는 건 알아보는구나. 그런데 이건 내 김장 배추란다."
혼잣말을 하며 벌레를 잡기 시작했다.
처음 텃밭을 가꿀 때만 해도 애벌레를 보면 소름부터 돋았다. 나뭇가지로 건드리거나 장갑 낀 손으로도 조심스럽게 집어내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제법 능숙하다. 잎을 살짝 젖히고 벌레가 있는 곳을 찾아내는 솜씨가 웬만한 벌레 사냥꾼 못지않다.
사람이란 참 적응을 잘하는 동물이다. 예전 같으면 비명을 질렀을 일을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으니.
더구나 벌레를 잡다 보니 녀석들의 식성까지 알게 되었다. 잎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으면 어딘가에 범인이 숨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잎이 겹치는 안쪽은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배추벌레는 몸을 숨기는 재주도 좋다. 초록색 몸을 잎에 붙이고 가만히 있으면 눈을 크게 뜨고 찾아야 한다.
이번에는 하얗게 모여 있는 진딧물까지 발견했다. 배추 잎에 무슨 밀가루라도 뿌려 놓은 줄 알았다. 검색해 보니 양배추 하얀 진딧물이라고 한다. 결국 진딧물 방제약도 조금 쳤다.
텃밭 농사를 시작할 때는 농약 없이 싱싱한 채소를 길러 먹겠다는 생각이 컸다. 하지만 막상 농사를 지어보니 자연은 내 생각처럼 움직여 주지 않는다. 배추가 맛있게 자라는 동안 벌레들도 부지런히 먹고 자란다.
그렇다고 벌레들에게 배추를 통째로 양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작은 텃밭에서만큼은 나도 지켜야 할 것이 있으니까.
배추벌레와의 전쟁을 치르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배추는 어떻게 저렇게 속이 찰까?'
배추는 바깥잎이 충분히 자란 뒤 가운데에서 새잎이 나오면서 안쪽으로 겹겹이 포개진다. 이것을 '결구'라고 한다. 품종과 생육 환경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햇빛과 물, 양분이 알맞게 공급되면 자연스럽게 속을 채워간다. 그러고 보니 배추밭을 지날 때마다 끈으로 허리를 묶어 놓은 배추들을 본 적이 있다. 나는 당연히 그렇게 묶어 주어야 속이 단단하게 차는 줄 알았다. 그래서 작년에는 무조건 따라서 묶어주었었다.
그런데 꼭 그런 것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배추는 스스로 속을 채운다. 배추를 묶는 일은 주로 늦가을 추위로부터 속잎을 보호하거나 수확을 앞두고 잎을 정리하기 위한 것이다.
괜히 서둘러 묶었다가는 잎 사이의 통풍이 나빠질 수도 있다니, 당분간은 그대로 두기로 했다.
배추도 제 힘으로 할 일이 있는 법이다. 내가 도와준답시고 너무 참견할 필요는 없겠다.
배추밭에서 한참을 씨름하고 나서 작두콩이 있는 곳으로 갔다.
지난번에 발견했던 작두콩은 그사이 제법 묵직해졌다. 기다란 꼬투리 안에 알이 차오르면서 몸집도 한층 튼튼해 보였다. 처음에는 몇 개 달리지 않아 아쉬웠는데, 이제는 그 몇 개가 얼마나 실하게 여물지 기다리는 재미가 생겼다.
많이 열리는 것만이 풍년은 아닐 것이다. 몇 개라도 제대로 익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기쁨이 있다.
가지도 여전히 꽃을 피우고 있다.
보랏빛 꽃 한 송이가 가을 햇살 아래 매달려 있다. 한여름에는 길고 탐스러운 열매를 척척 내놓더니 날씨가 서늘해지면서 가지의 몸집도 조금씩 작아지고 있다. 그래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벌레를 잡아낸 배추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잎마다 크고 작은 구멍이 뚫려 있고 가장자리가 뜯겨 나간 곳도 있다. 시장에서 파는 반듯한 배추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싫지 않다.
벌레가 먹은 자국은 성가시지만, 그 구멍 사이로 배추가 살아온 시간이 보인다. 뜨거웠던 햇볕과 며칠씩 내린 비, 서늘해진 아침 공기를 견디며 여기까지 자랐다.
나는 그동안 텃밭에서 무언가를 잘 키우는 일이란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며 기다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올해 배추를 키우면서 한 가지 일이 더해졌다.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이다.
잎을 뒤집어 보고, 속을 살펴보고, 어제와 오늘 달라진 모습을 알아채는 일. 그 과정에서 벌레도 발견하고 병든 잎도 찾아낸다.
다음 주에는 토란을 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