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텃밭! 18
오늘 아침에는 모처럼 부지런을 떨었다. 해가 높이 오르기 전에 텃밭으로 향했다.
며칠 만에 만난 배추는 속잎을 한 장씩 보태며 제법 배추다운 얼굴을 만들고 있었다. 얼마 전 솎아준 무도 기다렸다는 듯 잎을 넓혔다. 아직 여린데도 땅에 납작 엎드리지 않고 하늘을 향해 꼿꼿하다. 물을 흠뻑 주고, 잎이 탄탄하고 푸르게 자라라고 영양제도 뿌려주었다. 뿌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흙도 가만가만 끌어올려 주었다.
텃밭은 날마다 들여다보지 않아도 제 할 일을 한다. 나는 사흘에 한 번쯤 물을 주러 오지만, 그 사이 배추는 잎을 밀어 올리고 무는 땅속에서 몸을 키운다.
한쪽에서는 가지가 아직도 주렁주렁 열린다. 이제 그만 쉬어도 될 텐데 가지나무는 계절을 모르는 척 보랏빛 열매를 매달고 있다. 토란은 커다란 잎을 우산처럼 펼친 채 밭 한가운데를 지킨다. 잎만 보면 한여름인데, 언제쯤 땅속 식구들을 보여주려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들깨도 거두고 고추도 모두 뽑았다. 토란까지 캐고 나면 텃밭에는 배추와 무, 상추만 남는다. 조금 허전해질 자리를 생각하다가 시금치 씨앗을 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를 거두면 다른 하나를 심는 것. 텃밭에는 빈자리가 오래가지 않는다.
잠시 허리를 펴고 이웃 밭을 둘러보았다. 아직 고구마를 캐지 않은 밭이 많았다. 어느 밭에는 부추꽃이 하얗게 피었고, 어느 밭에는 허브가 정원처럼 자라고 있었다. 특히 레몬그라스 곁을 지날 때면 걸음을 늦추게 된다. 잎을 살짝 스치기만 해도 상큼한 향이 따라온다.
남의 밭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어찌 나들 싱싱하게 잘 키웠는지 부럽다가도, 우리 배추 앞으로 돌아오면 금세 마음이 든든해진다. 크기와 모양은 조금씩 달라도 밭마다 주인의 손길이 그대로 자라고 있다.
솔직히 나의 텃밭은 빈약하기 그지없다. 비닐멀칭도 하지 않아 물을 주면서 흙이 잎으로 다 튈까 조심조심 잎을 깨끗이 닦아가며 물을 준다. 퇴비도 거름도 하지 않아 부족한 게 많다. 좀 작게 자라면 작은 대로 만족하려고 마음을 비운채 나름 공을 들이는 편이다.
아침저녁 공기는 선선해졌지만 낮의 햇살은 아직 따갑다. 그래도 흙 사이에서는 분명 가을 냄새가 난다.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물을 주고, 영양제를 뿌리고, 흙을 북돋우다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꽃을 보러 따로 정원에 갈 일이 있을까.
텃밭에 오면 꽃도 있고, 향기로운 풀도 있고, 나무와 열매도 있다. 흙 묻은 장화를 신고 이 밭 저 밭을 기웃거리는 동안 가을은 이미 곁에 와 있었다.
텃밭은 채소만 키우는 곳이 아니라 계절을 가장 가까이에서 기르는 작은 정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