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잘하는 사람에게 일만 더 주는 조직

byDataSopher

회사에는 급여명세서에 찍히지 않는 세금이 하나 있다.

일을 잘할수록 더 많이 내는 세금이다.


보고서를 빨리 만들면 보고서가 하나 더 온다.

가장 무서운 단계가 온다.


“쟤한테 맡겨.”


칭찬처럼 들리지만 위험하다. ‘신뢰한다’는 뜻인 동시에 ‘앞으로 문제가 생기면 저 사람에게 보내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일을 대충 끝내서 시간이 남는다. 중요한 업무는 주지 않는다. 불안하니까.

반대로 어떤 사람은 업무를 빨리 끝낸다. 그러면 팀장은 말한다.

“시간 좀 되죠?”


같은 시간에 더 많은 일을 처리했다는 이유로 보상은 휴식이 아니라 추가 업무가 된다.

결국 직원들은 영리한 학습을 시작한다.


빨리 끝내지 않는다.

모르는 척한다.

굳이 나서지 않는다.


회의에서 문제를 발견하면 말했다. 입을 다문다. 말하는 순간 담당자가 자신이 된다는 사실을 배웠기 때문이다.


“이 부분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좋은 지적이에요. 그럼 한번 정리해보실래요?”


두세 번이면 충분하다.

사람은 조직이 가르쳐준 방식으로 행동한다.


조직에서 사람들이 소극적으로 변하는 것을 볼 때 개인의 태도부터 의심하지 않는다. 사람이 이전에 적극적으로 행동한 대가가 무엇이었는지 먼저 궁금해진다.


학계에는 이 현상을 설명하는 표현까지 있다. ‘High-performance punishment’, 높은 성과를 낸 사람에게 추가 바카라임을 주면서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나 인정은 충분히 제공하지 않는 현상이다.


2025년 European Research on Management and Business Economics에 실린 연구는 여러 국가 IT 조직의 직원 534명을 조사했다.


연구에서는 이런 ‘고성과 처벌’을 강하게 경험할수록 지식을 숨기거나 쌓아두는 행동과 양의 관계가 나타났다. 연구자들은 공정성에 대한 인식과 조직과 직원 사이의 심리적 계약이 이 과정에서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회사에서는 지식 공유를 문화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서로 노하우를 공유합시다.”


노션을 만들고 위키를 만들고 사내 세미나를 연다.

하지만 정작 일을 잘하는 사람이 자신의 노하우를 공유했을 때 돌아오는 것이 무엇인지 묻지는 않는다.


“이것도 할 줄 아시네요?”


업무가 하나 늘어난다.


그렇다면 지식을 감추는 것이 정말 이기적인 행동일까.

조직이 만들어낸 합리적인 자기방어일 수도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조직이 스스로를 효율적인 조직이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능력 있는 사람 몇 명에게 업무를 몰아주면서 시스템의 허점을 사람의 체력으로 막고 있을 뿐이다.


A가 없으면 프로젝트가 멈춘다.

B가 휴가를 가면 아무도 데이터를 뽑지 못한다.

C만 고객의 히스토리를 알고 있다.


회사는 말한다.

“역시 핵심인재야.”


다르게 본다.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면 그 사람의 뛰어남은 조직의 강점이면서 동시에 조직 설계의 실패를 가리는 커튼이 된다.


2026년 Microsoft Work Trend Index도 흥미로운 방향을 보여준다.

AI를 활용하는 2만 명의 지식노동자를 분석한 결과, 직원들이 체감하는 AI 업무 효과와 연관된 요인에서 조직문화·관리자 지원·인재관리 같은 조직 요인의 중요도가 개인의 태도나 행동보다 훨씬 크게 나타났다.


Microsoft는 이를 두고 “사람이 준비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조직이 따라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설명한다. 이 분석은 자기보고 자료에 기반한 통계적 연관성이라는 한계가 있다.


AI 시대가 되면 더 심해질 수 있다.

AI를 잘 쓰는 직원이 있다고 해보자.

남들이 하루 걸리던 보고서를 두 시간 만에 만든다.


회사는 감탄한다.

무엇을 할까.

퇴근시켜줄까?


아마 높은 확률로 새로운 보고서를 준다.

AI가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같은 사람에게 더 많은 일을 밀어 넣는 압축기가 될 수 있는 이유다.


생산성이 두 배가 되었는데 업무량도 두 배가 되면 기술 발전의 과실은 직원에게 남지 않는다.

조직이 가져간다.

그러면 직원도 곧 계산법을 바꾼다.


AI를 잘 쓰는 능력을 숨기거나, 개선 아이디어를 말하지 않거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일부러 좁힌다.


바보가 돼서가 아니다.

너무 빨리 배운 것이다.

“잘하면 일이 늘어난다.”


직원들이 학습한 조직은 위험하다.

회사는 그것을 몰입 부족이라고 부르겠지만 인센티브 설계가 사람들에게 그렇게 행동하라고 가르친 결과일 가능성이 있다.


좋은 조직은 일을 잘하는 사람에게 일을 더 주기 전에 먼저 묻는다.

무엇을 빼줄 것인가.

어떤 권한을 줄 것인가.

어떤 보상을 줄 것인가.

다음 성장으로 연결되는가.


업무를 하나 추가한다면 기존 업무 하나를 제거하는 것이 정상이다.

더 큰 바카라임을 맡긴다면 더 큰 권한도 함께 가야 한다.

계속 해결사 역할을 맡긴다면 그 능력이 승진과 보상과 경력으로 남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핵심인재’라는 말은 싸고 빠르게 많은 문제를 해결해주는 사람이 된다.

유능한 사람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회사보다, 유능한 사람이 오래 유능할 수 있도록 만드는 회사가 더 강한 조직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잘 쓰는 것과 사람을 소모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경영이다.

그 차이를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사람은 CEO도, HR도 아니다.

늘 일이 몰리는 바로 그 사람이다.


그 사람이 더 이상 문제를 발견해도 말하지 않는다.

회의에서 고개만 끄덕인다.

예전 같으면 한 시간 만에 끝냈을 일을 천천히 한다.


조용히 이력서를 업데이트한다.

회사는 묻는다.

“잘 다니던 사람이 갑자기 왜 나가지?”


갑자기가 아니다.

오래전부터 떠나고 있었다.


단지 회사가 계속 일을 주느라

그 사실을 보지 못했을 뿐이다.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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