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지루함도 사람을 소진시킨다

byDataSopher

일이 많아서만 사람이 망가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많이 일해서만 소진되는 것이 아니다. 너무 오래 아무것도 기대하지 못해도 망가진다.

ChatGPT Image 2026년 8월 24일 오후 02_46_58.png

아침 9시, 컴퓨터를 켠다.


메일 몇 통을 읽는다. 어제 만든 엑셀을 다시 연다. 숫자 몇 개를 바꾼다. 회의에 들어간다. 이미 결론이 난 이야기를 한 시간 동안 듣는다. 점심을 먹고 돌아와 보고서를 조금 고친다.


바쁘지는 않다.

퇴근할 때면 녹초가 된다.

“일도 별로 안 했는데 왜 이렇게 피곤하지?”


이 질문 앞에서 사람을 의심한다.

의지가 부족한가. 배가 불렀나. 일이 편해서 그런가.

나는 오히려 일이 너무 편한 것이 문제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WHO가 정의하는 번아웃에는 에너지 고갈뿐 아니라 일에 대한 냉소와 직업적 효능감 저하가 포함된다. 즉 사람을 소진시키는 것은 업무량만이 아니다.


조직심리학에는 이미 ‘직무 지루함(job boredom)’이라는 연구 분야가 있다.


2025년 <Current Psychology>에 발표된 연구에서는 120명을 대상으로 열흘 동안 하루 세 차례, 총 1160회의 관찰을 진행했다. 결과는 흥미롭다. 평소보다 업무가 더 지루했던 날에는 같은 사람의 번아웃 수준도 더 높았다.


더 놀라운 연구는 한국에서 나왔다.


한국 임금근로자 30,992명의 자료를 분석한 2024년 연구에서는 업무 지루함이 불면 위험 증가와 관련됐고, 그 관계의 약 23.38%를 번아웃이 매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횡단면 연구라 인과관계를 단정할 수는 없다. 그래도 ‘할 일이 없으면 편하다’는 상식에는 불편한 데이터다.


지루함은 심지어 몸에도 흔적을 남길 가능성이 있다.


핀란드 공공부문 근로자 125명을 조사한 연구에서는 직무 지루함이 높을수록 수면 중 심박변이도(HRV)가 낮은 경향이 관찰됐다. 연구진은 연령, 성별, BMI와 생활습관 등을 통제한 뒤에도 관계가 남았다고 보고했다. 작은 표본의 연관성 연구라 확대 해석은 피해야 하지만, 지루함을 단순한 기분 문제로만 볼 수 없다는 단서다.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지칠까.


사람의 뇌는 에너지를 덜 쓰는 것을 원하는 기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데 하지 못하는 상태, 내 능력이 필요하지 않은 상태, 오늘과 내일이 똑같을 것 같은 상태 역시 에너지를 잡아먹는다.


시간이 가지 않아 시계를 본다.

집중할 이유가 없어 집중하려 애쓴다.

의미를 느끼지 못하면서 의미 있는 척한다.


지루한 온라인 게임인의 피로는 일을 해서 생긴 피로가 아니라 자신을 억누르느라 발생한 피로인지 모른다.


자동화는 인간에게 재미없는 일을 없애줄 것이라고 오래 믿었다. 그런데 현실에는 반대의 가능성도 있다. 로봇이 업무 일부를 가져가고 나면 인간에게 기계가 아직 처리하지 못하는 파편적이고 반복적인 ‘잔여 업무’만 남을 수 있다는 연구가 있다.


2025년 Economica연구 역시 로봇화가 어떤 환경에서는 인간의 업무를 더 반복적이고 덜 흥미롭게 만들 수 있는 ‘residual task effect’를 지적한다.


참 역설적이다.


AI가 일을 대신해 인간이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AI가 재미있는 일을 가져가고 인간이 예외 처리 담당자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앞으로 좋은 회사의 질문은 “직원들이 얼마나 바쁜가?”가 아니어야 한다.


“이 사람에게 생각할 일이 남아 있는가?”

“자기 판단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있는가?”

“지난해보다 어려운 문제를 풀고 있는가?”


사람에게 일이 너무 많으면 줄여줘야 한다.

하지만 일이 너무 재미없다면 일을 더 줄여주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더 어려운 문제, 더 큰 자율성, 결과에 대한 소유권이 필요하다.


좋은 조직을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의 능력을 낭비하지 않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쉬는 것은 사람을 회복시키지만, 쓸모없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은 사람을 말린다.


번아웃은 사람이 너무 뜨거워져 타버리는 일이라면,

지루함에 의한 소진은 조금 다르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사람이 천천히 식어버리는 일이다.


회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직원은 지쳐서 불평하는 사람이 아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다.





참고한 자료

WHO, Burn-out an occupational phenomenon — 번아웃의 ICD-11 정의.

Kim et al., Current Psychology, 2025 — 10일간 일일추적 연구에서 직무 지루함과 당일 번아웃의 관계 분석.

Shin & Ryoo, Journal of Occupational and Environmental Medicine, 2024 — 한국 임금근로자 30,992명, 직무 지루함·번아웃·불면의 관계 분석.

Seppälä et al., Stress and Health, 2024 — 직무 지루함과 수면 중 심박변이도(HRV)의 관계 연구.

Nikolova, Economica, 2025 — 자동화가 인간에게 반복적인 ‘잔여 업무’를 남길 가능성에 관한 분석.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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