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일이 어려워서만 지치는 게 아니다.
내가 왜 이 문제를 풀고 있는지 모를 때 더 빨리 닳는다.
회사에서 자주 이런 말을 한다.
“좀 편했으면 좋겠다.”
“머리 안 쓰고 할 수 있는 일이면 좋겠다.”
틀린 말은 아니다. 사람에게는 휴식이 필요하고 과도한 업무는 분명 사람을 망가뜨린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긴다.
일이 쉬워졌는데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
회의는 줄었고 야근도 없다. 익숙한 업무라 실수할 일도 별로 없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큰 사고 없이 흘러간다. 오후 네 시가 되면 시계를 본다.
아직도 네 시다.
문제는 내가 풀고 싶은 문제가 하나도 없다는 데 있었다.
2026년 발표된 자기결정성이론 관련 메타분석은 192개 연구를 종합했다. 자율성·유능감·관계성과 같은 심리적 욕구가 충족되고 스스로 선택했다고 느끼는 동기가 강할수록 업무 몰입과 만족 같은 긍정적 결과와 연결되는 패턴이 확인됐다.
사람은 덜 힘든 일을 원하는 존재가 아니다.
어떤 문제에는 기꺼이 힘들어하고 싶어 한다.
게임을 생각해보자.
아무 버튼이나 눌러도 이기는 게임은 처음에는 즐겁다. 오래 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이길 수 없는 게임 역시 꺼버린다.
사람을 붙잡는 것은 그 사이에 있다.
조금 어렵다.
해볼 만하다.
한 번 더 해보고 싶다.
몰입 연구에서도 개인의 능력과 도전 수준이 적절하게 맞을 때 깊은 몰입이 나타날 가능성이 커진다는 결과가 반복돼왔다. 인간의 몰입을 난이도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너무 쉬운 과제 역시 몰입의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은 꽤 중요하다.
회사들은 이 문제를 거꾸로 해결한다.
직원이 힘들다고 하면 일을 잘게 쪼갠다.
매뉴얼을 만든다.
승인 절차를 붙인다.
판단하지 않아도 되는 업무를 만든다.
효율적이다.
동시에 사람에게서 문제의 소유권을 빼앗아간다.
“이 고객은 왜 떠날까요?”라는 질문을 주는 대신
“이 엑셀을 금요일까지 업데이트하세요”를 준다.
“우리 제품에서 무엇이 잘못됐을까요?”가 아니라
“이 지표 세 개만 뽑아주세요”라고 말한다.
사람은 문제를 푸는 사람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사람이 된다.
바로 여기서 AI 시대의 역설이 시작된다.
앞으로 가장 먼저 자동화되는 것은 대체로 정형화되고 반복 가능하며 설명하기 쉬운 일이다. 그토록 원했던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업무’일수록 기계가 잘한다.
쉬운 일을 확보하는 것이 안전한 커리어 전략이라고 생각했다면 한 번쯤 반대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쉬운 일은 AI에게 넘겨지기 쉬운 후보일 수 있다.
무엇을 문제로 정의할지, 왜 그것을 풀어야 하는지, 무엇을 포기할지 결정하는 일은 인간의 몫이 크다.
좋은 조직이 직원에게 주어야 하는 것은 ‘편한 업무’만이 아니다. 내 문제라고 느낄 만한 문제다.
최근 직무재설계(job crafting) 연구들을 정리한 체계적 문헌고찰도 사람들이 자신의 역할과 강점·선호를 더 잘 맞출 수 있도록 일을 능동적으로 조정하는 것이 직무 만족과 웰빙, 몰입에 중요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모든 일이 재미있을 수는 없다.
세상에는 반드시 누군가 해야 하는 지루한 일도 있다.
지루한 일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사람의 하루 전체를 지루한 일로 설계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Gallup의 2026년 조사에서 전 세계 온라인 게임인 가운데 업무에 몰입하고 있다고 분류된 비율은 20%에 그쳤다. 이것만으로 원인을 특정할 수는 없다. 적어도 하나를 물어볼 필요가 있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하루의 상당 부분을 일하면서도 일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을까. 나는 커리어를 고를 때 “어떤 일이 편할까?”보다 다른 질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떤 문제라면 실패하면서도 다시 풀어보고 싶은가.
연봉도 중요하고 워라밸도 중요하다. 회사의 안정성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들만으로 직업을 고르면 조건은 괜찮은데 삶이 무료해지는 순간이 찾아올 수 있다.
우리는 편안함만으로 오래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가끔은 해결되지 않은 문제 하나가 좋은 의자보다 사람을 더 오래 자리에 앉혀놓는다.
커리어란 쉬운 일을 찾아다니는 과정이 아니다.
내가 기꺼이 어려워하고 싶은 문제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참고한 자료
Gallup, State of the Global Workplace 2026 — 2025년 전 세계 직원 몰입도 20%.
Self-Determination Theory and Workplace Outcomes : A Meta-Analysis, 2026 — 192개 연구를 종합한 온라인 게임 내 자율성·동기 연구.
Redesigning roles through job crafting : a systematic literature review and future research directions, 2026.
A Scoping Review of Flow Research — 도전 수준과 능력, 몰입의 관계를 폭넓게 검토한 문헌고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