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

친절과 경계 사이에서

by삼육오늘

토론토는 서울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그래서인지 첫인상의 강렬함은 덜했지만, 높은 빌딩과 낯익은 풍경 덕분에 묘한 친숙함이 감돌았다. 하얀 눈에 뒤덮인 1월의 시내는 지금도 생생하다.



사실 토론토에 도착하기까지 시작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밴쿠버를 경유해 오는 일정이었는데 수하물 하나가 사라져 포기하고 분실 신고를 접수하려던 찰나, 거짓말처럼 가방을 되찾았다. 그 소동으로 시간이 지체되어 결국 토론토행 비행기를 놓쳤다. 다행히 다음 비행기가 있어 공항에서 하룻밤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예정보다 훨씬 늦게 토론토에 도착하게 되었다. 잠도 제대로 못 잔 데다 시차까지 겹치니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었다. 홈스테이 집에 도착해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짐만 내려놓은 뒤 곧바로 다시 밖으로 나왔다. 피곤했지만 지금 자면 새벽 내내 깨있게 될 것 같았고, 무엇보다 휴대전화를 개통해야 했다. 핸드폰 없이 하루를 버티는 한국인이 과연 몇이나 될까.

유학원에서 안내해 준 매장으로 가기 위해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역으로 걸어갔다. 숙소는 다운타운에서 지하철로 15분 정도 떨어진 동쪽 주택가였는데, 사람이 살고 있는 집들은 가득한데도 거리는 놀라울 정도로 적막하고 깨끗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텅 빈 거리를 걷는 기분이었다.



지하철에 올라 목적지를 재차 확인하며 노선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제법 능숙하게 잘 해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객관적으로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 앞에 서 있던 남자가 계속 나를 힐끔거리더니 다가와 한국인이냐고 여행 왔냐고 물었다. '티가 많이 났나 보네...' 자연스럽게 행동한다고 생각했는데 남들의 눈에는 영락없는 이제 막 여행 온 관광객처럼 보였나 보다. "응, 한국인이야. 방금 토론토에 도착했어"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남자의 눈빛이 달라졌다. 마치 순진한 외국인을 만난 것이 재미있다는 듯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디를 가는지, 왜 가는지, 얼마나 머무는지 계속 캐물었다. 대화를 이어갈수록 조금씩 불편해졌다. 혹시 같은 역에서 내리면 어쩌지 싶어 먼저 어디에서 내리냐고 물어봤다. 대답은 어물쩍 넘어갔다. 역 이름은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적어도 내가 내리는 곳은 아니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때의 나를 돌이켜 생각하면, 당황하지 않고 누구와도 스몰토크를 잘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친절한 한국인의 이미지를 지키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환승을 해야 하니 그만 가보겠다고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남자는 우연인지 고의인지 내 옆에 바짝 붙어 동행하기 시작했다. 팔에 찰싹 달라붙어 "사람 많은 데서는 조심해야 한다"며 은근히 남자친구인 척 툭툭 터치하는데 불쾌함이 밀려왔다. 마무리를 지으려 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는 가지 않고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연락처를 달라고 했고, 거절하자 이번에는 "마지막이니 포옹으로 인사하자"며 서있는데, 거절하면 자리를 뜨지 않을 것 같고, 하기는 싫고, 그렇지만 예민한 사람으로 보이기는 싫고.. 결국 마지못해 가볍게 포옹을 하고 겨우 헤어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순진해 보이는 외국인에게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게 꽤 흔한 수법이었다. 눈치 빠르다고 자부하고 살아왔는데, 이런 찝찝한 일을 겪다니.. 그렇게 내 토론토 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다사다난하게 시작되었다.

이전 01화프롤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