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토론토 생활에 적응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내가 머물게 된 홈스테이는 필리피노 아주머니와 수단 출신의 방사선사 아저씨, 그리고 모범생 두 딸이 사는 집이었다.
내 계획은 원래 그랬다. 딱 한 달만 홈스테이에서 지내고 아파트를 렌트할 생각이었다. 룸메이트를 구해 아파트에 사는 게 조금 더 자유롭고, 아주 적게나마 비용도 절약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여겼다. 문제는 단기간에 마음 맞는 룸메이트를 찾을 수 있느냐였다. 이건 낯선 타지에서 마음에 드는 집을 구하는 것보다 몇 배는 어려운 일이었다.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 데다 대부분 단기 연수로 오는 경우가 많아서, 조건과 성향이 모두 맞는 사람을 찾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네이버 카페에서 나와 비슷한 조건으로 룸메이트를 구하는 글을 발견해 바로 쪽지를 보냈다. 그분 역시 마음이 급했는지 금방 답장이 왔고, 우선 서로 잘 맞을지 알아가 보자며 카페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해 왔다.
어딘지 세 보이는 인상에 피곤이 서린 얼굴을 한 여자분이 어색하지만 최대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왔다. 살짝 부스스하지만 새까만 긴 머리, 큼직한 이목구비, 그리고 한국의 유행과는 거리가 먼 갈매기 눈썹까지. 왠지 모르게 해외 생활에 대한 깊은 내공이 자리 잡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분은 자신의 단골 커피숍으로 가자며 좁은 골목길의 어느 작은 카페로 나를 안내했다. 평소 프랜차이즈나 공간이 넓은 카페를 선호하는 나와 달리, 작고 조용한 카페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어쩌면 보이는 이미지와는 다를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카페로 걸어가는데, 갑자기 나를 바라보며 한마디를 건넸다.
"키가 되게 기네요?"
'키가... 길다고...?'
내가 생각한 룸메이트의 조건은 단순했다. 일단 조용하고, 토론토에서 적어도 6개월, 혹은 1년 이상 거주할 계획이 확실한 여자일 것. 어차피 나도 집에서는 조용히 지내는 편이니 그저 서로 배려하며 무난하게 지낼 수 있는 사람이면 충분했다. 그런 면에서 일단 그분은 조건에 꽤 부합하는 사람이었다.
약간은 굳어 있는 표정으로 나에 대해 간략하지만 마치 호구조사를 하듯 물어왔다. 내 대답이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조금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이번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오랫동안 이어갔다.
미국에서 패션을 전공으로 유학 생활을 했고, 미국 영주권을 받고 싶었으나 받지 못해 현재는 캐나다에서 일하며 다음 시기를 노리는 중이라고 했다. 같은 전공자를 만난 반가움과 궁금한 마음에 슬쩍 질문을 던졌지만, 돌아온 건 차가운 반응이었다. 자신의 아픈 과거라 그때의 미국 이야기는 꺼내고 싶지 않다며, 쓰디쓴 기억을 떠올린 사람처럼 얼굴을 찌푸린 채 내 입을 막아버렸다.
'이분... 생각보다 꽤 예민한 사람 같네...'
이전 룸메이트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무조건 조용한 사람을 원한다며 자신은 집에서 정말 '잠만 자는 사람'이라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덧붙여 토론토엔 조선족이 많아 경계해야 한다며 이전에 조선족 누군가가 자신을 신고하는 바람에 크게 당한 적이 있다고 분해하기까지 했다.
어딘지 미스터리한 느낌이 드는 언니였지만, 서로가 찾는 룸메이트의 기본 조건에는 들어맞는다고 결론을 내리고 함께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캐나다에서 지낸 지 2년 정도 되었다더니 확실히 집을 보는 손길이나 태도가 능숙해 보였다. 총 네곳을 둘러본 끝에 가장 괜찮아 보이는 한 곳으로 마음을 모으고 계약을 진행하기로 했다. 여행을 떠난 집주인이 돌아오는 대로 바로 계약서를 쓰기로 하고 헤어졌다. 사실 집을 알아보는 내내 살짝 그 언니의 주도로 흘러가는 듯해 약간의 찝찝함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많았고, 어차피 친한 친구랑 살아도 싸우는 법인데, 그냥 깔끔하게 룸메이트로 생각하자. 라며 스스로를 다독인 채 계약날만 기다렸다.
집을 계약하기 바로 전날 저녁, 갑자기 언니로부터 연락이 왔다.
"저기...... 한국에 계신 부모님과 가족 모두 베트남으로 여행을 가시는 바람에 돈을 받아야 하는데 못 받게 돼서.. 혹시 내 계약금을 먼저 내주고 다음 주에 줘도 될까?"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 돈 이야기를 꺼내니 순간 곤란해졌다. 아주 큰 액수는 아니었지만,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서 돈 이야기라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막막하고 당황스러웠다. 처음부터 이렇게 나오니 섭섭하고 의심스러운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 '어차피 앞으로 계속 같이 지낼 사이인데 진짜 급한 사정이 생겨서 그런 건 아닐까? 그냥 빌려줘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언니가 당장 돈을 마련할 수 없다는 이유는 부모님을 포함한 가족 모두가 본인도 모르게 동남아로 여행을 갔기 때문인데 해외에서 송금이 되지 않아 가족이 한국에 도착한 뒤에 송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순간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는 돈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액수보다 먼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한테 돈을 빌려줘도 되는 걸까?’
결국 나는 돈을 빌려줄 수 없을 것 같다고 거절의 뜻을 전했다. 앞으로 계속 얼굴을 볼 사이인데 자신을 믿어주지 않은 게 서운했던 걸까. 언니는 실망했다는 말과 함께 어떻게든 계약금을 구해 보겠다며 통화를 끊었다.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
'과연 이 사람을 믿어도 되는 걸까? 이렇게 같이 살기로 한 게 정말 잘한 결정일까?'
수많은 고민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아마 그 언니 역시 같은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통화를 끊고 서너십 분쯤 지났을까? 그 언니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집주인이 갑자기 사정이 생겨 우리와 계약할 수 없게 되었다고 통보해 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갑자기?이 타이밍에?'
아까 전 상기된 목소리로 서운함을 내비치던 것과 다르게 언니는 계약이 파기되었고 서로 인연이 아닌 것 같다며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그러고는 각자 다른 룸메이트를 구하는 게 좋을 것 같다며 좋은 사람을 만나길 바란다는 진심 어린 인사를 끝으로 헤어졌다.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는 알 수 없다.
정말 집주인에게 사정이 생겼던 걸까? 아니면 나에게 실망한 언니가 그렇게 말한 걸까?
어쩌면 정말 아무 일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우리는 함께 살지 않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