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작은 생이 남긴 것

삐삐가 다녀가고 누룽지가 왔다

by쭈쓰빵빵

나는 동물을 싫어한다.

정확히 말하면 살아서 움직이는 것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동물뿐 아니라 인간도 마찬가지다.

길을 걷다가 강아지를 산바카라시키는 사람을 만나면 강아지 한번 째려보고, 견주 한번 째려본다.

'목줄은 왜 저렇게 길어?'
'강아지는 왜 키우는 거야?'

물론 속으로만 하는 말이다.
개는커녕 병아리 한 마리 키워본 적 없다.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었다.

그런 내가 지금 강아지를 키우고 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시작은 고양이 한 마리였다.

남편에게는 행사 장비를 보관하는 마당이 있는 창고가 있다.

여름 끝자락, 남편이 그곳에서 새끼 고양이 두 마리를 발견했다고 했다. 비가 내리고 있었고 어미는 보이지 않았단다.

어미가 돌아올지도 몰라 비를 피할 수 있도록 해주고 왔는데, 다음 날 다시 가보니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는 것이다.

남은 한 마리도 그대로 두면 죽을 것 같다고 했다.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새끼 고양이 분유랑 젖병 좀 사다 놔줘."

"뭐? 고양이를 집에 데려온다고?"

나는 펄쩍 뛰었다.

그런데 남편은 일단 오늘 하루라도 살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 말에는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난생처음 반려동물용품을 파는 가게에 갔다.
분유와 젖병, 배변 패드를 샀다.

남편은 수건에 돌돌 싼 새끼 고양이를 데려왔다.
눈도 뜨지 못한, 손바닥보다 훨씬 작은 녀석이었다.
나는 만질 엄두도 내지 못했다. 대신 종이 상자에 담요를 깔아주었다.

아들은 분유를 타서 젖병을 물렸다. 녀석이 한 번에 먹는 양이 워낙 적어 수시로 먹여야 했다.

아이들은 신이 났다.
아들은 이름까지 지었다.

"삐삐로 할래."

딸이 한마디 했다.

"삐삐가 뭐야. 그냥 누렁이로 해."

치즈색 털을 가진 녀석이었다.
하지만 아들은 삐삐가 좋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 집에 삐삐가 생겼다.

나는 여전히 멀찍이서 구경만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 상자 안을 들여다보게 됐다.
귀엽긴 했다.
아주 조금.


다음 날 아침이었다.
딸이 울면서 안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엄마! 삐삐가 이상해!"
삐삐는 입을 벌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딸은 엉엉 울었다. 남편은 아침밥도 먹지 않고 삐삐를 데리고 나갔다.

그런데 아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전날 여러 차례 분유를 먹이고 이름까지 지어준 아이였다.

나는 만져보지도 못한 고양이가 죽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좋지 않았는데, 아들은 얼마나 속상할까.
그 침묵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나중에 아들에게 물었다.

"너 괜찮아?"

"안 괜찮아. 너무 속상해."

울지 않는다고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들은 고양이나 강아지를 키우면 안 되겠느냐고 했다. 유기견이라도 좋다고 했다.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동물을 좋아하지도 않고, 키워본 적도 없었다.
무엇보다 생명 하나를 바카라임진다는 게 얼마나 큰일인가.

그런데 아들이 강아지 사진 하나를 보여줬다.
작고 복슬복슬한 갈색 강아지였다.

"엄마, 얘 한 번만 보러 가면 안 돼?"

결국 주말에 대전의 애견샵에 갔다.
사진 속 강아지가 있는 곳이었다.


정말 보기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보니 사진보다 더 귀여웠다.
아들은 강아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는 일단 밥부터 먹자고 했다.
근처 식당에서 김치찌개를 먹으며 현실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네가 키운다고 해도 학교 가고 학원 가면 누가 돌봐? 결국 엄마 차지잖아."

"내가 다 할게."

"강아지 키우는 게 보통 일이 아니야."

"진짜 잘 키울게."

밥을 다 먹었는데도 아들은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엄마, 한 번만 더 보고 가면 안 돼?"

다시 강아지가 있는 곳으로 갔다.
아들은 유리창 너머 강아지를 한참 바라봤다.

"엄마! 내가 키울 테니까 얘 데려가면 안 돼?"

삐삐가 떠올랐다.
작은 젖병을 물리던 아들의 모습도.
내가 조금 더 돌봤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미안함도 남아 있었다.
그렇다고 그 마음만으로 새로운 생명을 데려와도 되는 건지 자신이 없었다.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렇게 우리 집에 강아지가 왔다.

나중에야 알았다.

분양샵을 통한 구매가 일부 번식장의 열악한 환경과 맞닿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동물을 키울 생각조차 없던 나는 그런 문제에 무지했다.

몰랐다는 말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겠지만 이제는 내 곁에 온 이 생명을 끝까지 바카라임지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름은 누룽지.

사연도 우습다.
삐삐의 이름을 지을 때 딸이 "누렁이로 해"라고 했던 말을 아들은 '누룽지'로 알아들었던 모양이다.
털 색깔도 비슷하니 그냥 누룽지로 하잔다.

그렇게 누룽지가 되었다.

그런데 정작 강아지를 데려오고 나니 내가 문제였다.
가족들은 신이 났는데 나는 우울했다.
아이들을 낳았을 때도 그랬다. 새 생명이 너무 소중해서 오히려 두려웠다.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은 생각에 산후우울도 심하게 겪었다.

누룽지를 보면서도 비슷한 감정이 올라왔다.
이 작은 녀석에게는 앞으로 우리 가족이 세상의 전부일 텐데.
잘 키워야 한다는 부담감도 컸지만, 더 힘들었던 건 엉뚱하게도 아직 오지 않은 이별이었다.

지금은 이렇게 아장아장 뛰어다니지만 언젠가는 늙을 것이다.
초롱초롱한 눈이 흐려지고 걸음도 느려지겠지.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 곁을 떠날 것이다.
나는 어린 누룽지를 보면서 벌써 그날을 상상하고 있었다.

먼 훗날 오늘의 모습을 얼마나 그리워할까.
생각만 해도 슬펐다.
아이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 왜 벌써 그런 생각을 해?"

"아직 한참 남았잖아. 그동안 우리한테 기쁨을 줄 일이 얼마나 많은데."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머리로 안다고 마음까지 따라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일주일가량 마음이 힘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괜찮아졌다.
누룽지는 여전히 잘 먹고, 잘 뛰어다니고, 사고도 친다.

이제는 나도 녀석을 보며 웃는다.
며칠 전에는 목욕도 시켰다.
복슬복슬한 털이 물에 젖자 전혀 다른 강아지가 나타났다.
이 녀석이 그 녀석인가 싶었다.

웃음이 났다.


가끔 삐삐 생각을 한다.
삐삐는 우리 집에 하룻밤 머물다 떠났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작은 생명.
그런데 그 짧은 만남이 우리 가족에게 남긴 것은 결코 작지 않았다.

삐삐가 아니었다면 아들은 그렇게 간절하게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평생 동물을 싫어하는 사람으로 살았을지 모른다.
그리고 누룽지도 우리 가족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삐삐가 누룽지를 만나게 해 주려고 태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이런 생각은 든다.
삶의 길이가 그 삶이 남기는 의미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삐삐의 묘생은 너무도 짧았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분명 무언가를 남겼다.


모든 생명에게는 저마다 이 세상에 왔다 가는 이유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이유를 우리가 다 알 수는 없겠지만.
삐삐가 다녀간 자리에 누룽지가 왔다.

그리고 평생 동물을 키울 생각이 없었던 나는 지금 누룽지의 보호자로 살고 있다.
여전히 언젠가 찾아올 이별이 두렵다.
하지만 이제는 오지도 않은 그날을 미리 슬퍼하기보다, 오늘 내 곁에 있는 이 녀석과 잘 지내보려고 한다.

누룽지는 오늘도 아무 걱정 없이 집 안을 뛰어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