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구원하는 것은 오직 나 자신뿐

by이고은

돌아보면 언제나 그랬다. 인생의 매 고비마다, 벼랑 끝에 몰린 듯 위기가 닥쳐올 때마다, 그 막막한 벽을 뛰어넘거나 돌파해 낸 것은 결국 나 스스로의 힘이었다.


세상에 나 아닌 그 누구도 내 결핍과 불안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손톱 끝 거스러미처럼, 언뜻 별 것 아닌 것처럼 사소해 보여도 나에게만은 지독하게 불편한 미세한 흠과 틈을 타인은 결코 알아채지 못한다. 아무리 사랑하는, 다정하고 선의에 가득 찬 사람일지라도 타인은 결국 타인이다. 내 몫의 통증을 대신 앓아줄 수는 없다.


삐걱거리는 마흔의 몸을 복원해 내겠다고 문득 결심한 날. 돌아보면 그날 특별한 순간이라고 할 만큼, 거창하거나 극적인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그동안 알고도 모른 척, 외면하고 덮어두었던 무수한 위험 신호들이 차곡차곡 쌓여가다가 마침내 그 임계점을 살짝 넘어섰을 뿐이다.


사실 돌아보면 계기는 충분했다. 아침마다 느껴지던 몸 곳곳의 크고 작은 통증들, 맞지 않아 옷장 구석에 처박아 둔 옷들, 건강검진 검사에서 울려대던 경고음들. 그러나 그간 나는 그 신호에 응답하지 않은 채, 눈을 질끈 감고 모른 척 살아왔다.


돌파하기 위해 변화할 것인가, 아니면 안온하게 침묵한 채 살 것인가. 인생은 대체로 두 갈래 중 어느 한 길을 따르기 마련이다. 혈기 왕성하던 20대, 30대에는 매 순간 치열하게 변화를 좇고 목표를 향해 꾸준히 달리는 것만이 미덕이라 믿었다. 하지만 나이 마흔 중반에 다다른 지금은 둘 중 어느 하나만이 정답이라고 단정할 순 없다.


생업의 전선 위에서 위태롭게 버텨내는 삶 속에서, 자기 몸 하나 돌볼 여력 없는 이의 시간은 전혀 다른 속도로 흘러간다. 주어진 무게를 견뎌내며 그저 묵묵히 하루를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응원과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오늘을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긍심을 품기에 충분하다. 그러니 억지로 스스로를 다그칠 필요는 없다. 그저 숨을 고르며, 나의 계절이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시간이라 여겨도 좋을 것이다.


다만, 더 이상의 불편함을 견디기 힘들어지고 새로운 시도만이 나를 구원할 유일한 길이라 여겨지는 어떤 순간이 온다면, 그때야말로 변화를 도모하기에 최적인 시간이다. 세상의 기준이나 타인의 기대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몸과 마음이 보내는 솔직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데서부터 삶의 완결성을 향한 첫걸음이 시작된다.


지난 몇 달간 나는 AI를 도구 삼아 1g 단위까지 달아가며 식사를 차려내고, 거의 매일 3~5km의 트랙을 달렸으며, 90층의 아파트 계단을 밟아 올랐다. 모든 것을 기록하고 분석하며 스스로를 통제해 간 그 정직하고 고독한 시간 속에서, 내가 다시 한번 배운 중요한 사실은 결국 내 삶을 만들어가는 주인공은 나 자신이라는 엄연한 진실이었다.


물론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중간중간 다시 식욕이 차오르고, 운동하러 나가려다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 발걸음을 되돌리고 싶은 날도 있었으며, 모든 끼니를 일일이 기록하는 것이 버거워 죄다 내팽개치고 싶은 날도 있었다. 하지만 그 갈림길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결국 온전히 나의 생각과 의지에 달려 있었다.


식단을 통제하며 루틴을 유지하고, 신발 끈을 묶고 현관문을 열고 밖을 나서며, 매 순간의 데이터를 담담히 기록함으로써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일. 매 찰나의 결단과 실천은 오롯이 내 손끝에서 시작되는 것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만약 자신의 묘비명이 있다면 ‘작가(그리고 러너)’라고 쓴 뒤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고 새겨지길 바란다고 적었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했다, 참을 수 있는 한 참았다고 나 나름대로 납득하는 것에 있다”며, 자신의 의지로 실패하고 성취하는 모든 과정 속에서 교훈을 배워나가는 일의 의미를 짚었다.


내 삶을 구원하는 여정의 시작도, 끝도, 오로지 나 자신뿐이다. 그 길을 묵묵히 완주해 나가는 것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


어느 것에도 미혹됨이 없다는 나이 불혹(不惑)에 도리어 맞이한 수많은 불안과 흔들림 속에서, 적어도 내 몸과 일상의 온전한 주인이 되어가고 있다는 단단한 통제감만은 나에게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선사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나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정직하고 단단한 위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