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뒤, 비숍이 다시 쓴 서문
1921년 봄,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은 파리 다다가 벌인 거리 행사를 결산하는 글에 '인공지옥(Artificial Hells)'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스캔들만으로는 "인공지옥에서 기대할 법한 희열"에 미치지 못한다고, 예술은 극장을 나와 거리로 가야 한다고 쓴 글이었죠. 이 제목은 보들레르의 『인공낙원』, 그러니까 마약이 제조하는 가짜 천국에 대한 바카라을 뒤집은 말로 읽힙니다. 낙원을 인공으로 짓는 것처럼 '지옥'을 인공으로 짓는 예술, 클레어 비숍이 참가예술 100년의 역사를 쓴 바카라의 제목이 여기서 왔습니다.
클레어 비숍의『인공지옥』은 2011년 가을즈음에 완성되어 12년에 출판됐습니다. 그리고 2022년, 10주년 재판에 새 서문을 쓰면서 비숍은 자신의 바카라을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10년 전에는 적대와 교란이 정치의 규범이 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오늘날 수백만 명이 인공지옥 속에 살고 있다.
A decade ago, it seemed unthinkable that antagonism and disruption might become the political norm. Today, millions are living in artificial hells.
— 클레어 비숍, 『인공지옥』 10주년 재판 서문(2022)
비숍은 먼저 자기 바카라이 어떤 시대의 산물이었는지 돌아봅니다. 『인공지옥』은 냉전이 끝난 뒤의 정치적 교착, 그러니까 모든 갈등이 합의와 중도로 봉합되던 1990~2000년대에 맞서 쓴 바카라이었습니다. 당시의 슬롯적 실천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비숍은 목록으로 정리합니다. 식사, 산바카라, 정원, 상영회, 토론처럼 함께 모이는 무해한 행위들이 예술이 됐고, 참여는 정치의 우회적 대체물이 됐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바카라은 매끄러움에 맞서 교란(disruption)과 마찰(friction)을 호소했습니다. **여기서 비숍의 어휘를 한번 정리해 두는 게 좋겠습니다. 적대(antagonism)가 바카라의 이론적 중심어라면, 교란과 마찰은 바카라이 호소한 실행의 방식이고, 위반(transgression)은 금기를 넘는 몸짓을 가리키는 전위예술과 대항문화의 오래된 말입니다. 겹쳐 보이지만 각자 자리가 다른 단어들이죠.
2012년 이후, 극우 내셔널리즘(Far-right nationalism)이 세계적으로 부상했고, SNS는 불화를 제조하는 기계로서 작용합니다. 위반과 교란은 이제 전위예술의 기술이 아니라 극우의 기술이기도 합니다. 바카라이 옹호했던 적대가, 바카라이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세상의 기본값이 된 거죠.
그 사이 미술계에서 '참여'는 제도적으로 성장했어요. 슬롯적 실천 전공 석사 과정이 세계 곳곳에 생겼고, 전담 학술지가 창간됐고, 주요 작가들이 미술관 회고전과 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비숍은 '담론으로서의 참여'는 시각예술에서 거의 완전히 사라졌다고 판단합니다.
첫 번째는 2011년의 오큐파이 월스트리트, 뉴욕 금융가의 주코티 공원을 점거하고 "우리가 99%다(We are the 99%—remaining 99% of people)"를 외친 시위입니다. 비숍은 공원의 임시 캠프와 손팻말들이 판지와 테이프로 공공장소에 기념비를 짓는 작가 토마스 히르슈호른(Thomas Hirschhorn)의 작품처럼 보였다고 쓰는데, 요점은 그 반대입니다. 예술이 저항을 재현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겁니다. 이제는 저항의 재현에서 저항의 실행으로 무게가 옮겨 갔고, 이후 10년은 광장에 몸으로 나타나는 시대였습니다. 미술사가이자 활동가인 예이츠 매키(Yates McKee)는 2016년에 오큐파이가 "슬롯참여예술의 종언"을 알렸다고까지 썼습니다. 참여예술이 현실의 운동 조직으로 성숙해 버렸다는 뜻으로요.
두 번째는 소셜미디어입니다. 참가예술이 하던 일,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에게 자기표현의 자리를 마련해 주는 일을 플랫폼이 더 효과적으로 하게 됐습니다. 비숍의 표현으로는, 이러한 플랫폼은 '선의의 중개자로서의 작가'를 제거하고, '참여'라는 말 자체가 조회수와 좋아요, 곧 지표와 수익화의 동의어가 되면서 작가들이 참여를 꺼리게 됐다는 겁니다.
이번 서문에서는 비숍의 자기비판이 눈에 띄는데, 자기 바카라의 편향성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인종문제인데, 바카라의 참여 담론은 백인 중심이었어요. 이는 미국 사례를 피하려다 백인 유럽 전위 중심의 계보가 됐으며, 그 결과 흑인 슬롯적 실천의 계보가 통째로 빠졌다는 겁니다. 바카라을 다시 쓴다면 흑표당(Black Panther Party)의 해방학교까지 거슬러 가는 장이 필요하다고요. 제 생각에는 아시안 또한 누락된 부분도 한계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하나는 기술문제입니다. 비숍은 바카라에서 '인터랙티브'와 '참여' 사이에 방역선(cordon sanitaire), 그러니까 전염을 막으려 긋는 차단선을 그었습니다. 기술이 매개하는 것은 전부 인터랙티브로 묶어 바카라 바깥에 두고, 몸이 한 자리에 모이는 것만 참여로 다룬 거죠. 돌아보면 그것은 디지털과 현장 사이의 풍부한 상호작용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결정이었다고 적습니다.
참여가 물러선 자리를 차지한 말은 '돌봄(care)'이 들어섭니다. 느림과 지속성, 누군가를 보살피고 주의를 ㅣ울이며, 바라보는 대신 곁에 머무는 그런 태도를 말아죠. 비숍은 흑인, 원주민 작가들의 작업에서 이런 전환이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타나는 점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다만, 돌봄은 해악에 맞서는 동시에 적대와도 거리를 둡니다. 그런 점에서 『인공지옥』의 중심에 놓인 적대의 미학과 긴장을 일으킵니다. 그렇다고 비숍은 돌봄 자체를 비판의 범위에서 제외하지 않고 있어요. 용어가 바뀌어도 비판적 질문은 계속되어야 하고, 돌봄과 인게이지먼트 또한 기관과 기업에 포섭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서문에는 우리가 다루는 전시 이야기와 정면으로 만나는 문단이 하나 있습니다. 미술관이 디지털 기술을 끌어안으며 내세운 말, '관객 인게이지먼트(engagement)'에 대한 것입니다. 비숍이 그 사례로 드는 목록에 미술관 앱과 소셜미디어 계정, 몰입형, 인터랙티브 경험(immersive, interactive experiences)이 명시돼 있습니다.
‘인게이지먼트’ 담론은 기관의 사명문 곳곳에 넘쳐나며, 문화에 접근하고 참여하는 일이 의심할 여지없이 민주적이고 보편적으로 좋은 일이라는 생각을 전한다. 그러나 인게이지먼트는 참여를 이데올로기적으로 다시 틀 짓는다. 집단적 문화 생산을 중심에 두던 참여를 마케팅과 관객 개발의 방향으로 돌려놓는다. 또한 후견주의적이고 일방향적이다. 관객은 전시된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기보다 콘텐츠를 얌전히 소비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말하자면, 인게이지먼트는 참여가 죽으러 가는 곳이다.
The discourse of 'engagement', sprinkled liberally across institutional mission statements, conveys the idea that access to and participation in culture is an unquestionably democratic, even universal good. Yet engagement is an ideological reframing of participation – away from collective cultural production and towards marketing and audience development. It is also paternalistic and monodirectional: a matter of audiences dutifully consuming content, rather than challenging the ideas on display. Engagement, we might say, is where participation goes to die.
— 클레어 비숍, 『인공지옥』 10주년 재판 서문(2022)
비숍은 여기서 비판의 범주에 대한 지적할 뿐이지만, 질문을 던져야 할 틈은 정확히 정해 줍니다. '참여'와 '경험'을 내세우는 전시의 언어가 집단적 문화 생산의 어휘인지, 마케팅과 관객 개발의 어휘인지, 그 구별은 전시마다, 현장에서 살펴봐야 하는 부분이죠. 더불어 ‘참여’ 담론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 속에서 거듭 변형된 것이라고 보고 있어요. 집회로, 인게이지먼트로, 돌봄으로 이름과 형식이 달라져도, 그 말이 어떤 관계와 권력을 만드는지 따져 묻는 일은 남습니다.
전시가 ‘참여’와 ‘경험’을 내세울 때, 관객에게는 어떤 역할과 권한이 주어질까요? 그리고 관객의 참여로 만들어지는 가치와 이익은 누구에게 돌아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