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혼자 떠나는 남미 여행기
왜냐하면 내려가야 했으니까.
올라오는 동안에는 몰랐는데, 위에서 내려다보니 바위가 훨씬 가파르게 느껴졌다. 어디에 발을 디뎌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분명 올라올 때는 길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내려가려니 그 길이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운동 신경도 꽝인데, 갑자기 클라이밍 실전편이라니.
정말 큰일이었다.
나 혼자라면 조금 더 시간을 끌어도 되겠지만, 뒤에서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렇다고 아무 데나 발을 내디딜 수는 없었다. 그러다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하필 내가 신고 있는 신발은 남미에서 잔뜩 굴리고 버리려고 가져온 신발이었기에 밑창 상태가 좋지 않았다.
결국 바위에 매달린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때 주변에 있던 외국인 여행자들이 하나둘 나를 도와주기 시작했다.
"여기를 잡아요."
"발을 저쪽으로 내려요."
"아래를 보지 말고 이쪽 보세요."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 발을 디딜 자리를 알려주는 사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변 사람들이 모두 내 하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고 싶었던 적은 없었는데, 어찌나 민망하던지.
나는 그들이 알려주는 대로 손을 옮기고 발을 내렸다.
한 발.
그리고 또 한 발.
그렇게 마침내, 도무지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하산이 끝이 났다. 평평한 땅에 발을 디뎠을 때, 그제야 안도할 수 있었다.
살았다.
정말로.
이토록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이렇게까지 괴로워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런데 고난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다음 목적지는 아나콘다 캐년이었다. 바위의 모양이 아나콘다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이름부터 심상치 않더니, 도착해 보니 그곳 역시 절벽투성이.
다행히 전처럼 함께 바위를 기어 올라갈 필요는 없었다. 대신 양옆으로 깎아지른 절벽이 펼쳐져 있었다. 다른 여행자들은 신이 나서 절벽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찍었다. 조금이라도 더 멋진 사진을 남기겠다며 아슬아슬한 곳에 서기도 했고.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렇게 무서운 곳에 왜 굳이 올라가는 걸까?
물론 풍경은 아름다웠다. 아니, 아름답기는 한 걸까? 솔직히 내 눈에는 아름다움보다 생명의 위협이 먼저 느껴졌는데.
이쯤 되니 아타카마에서 갔던 달의 계곡 투어가 차라리 그리워졌다. 거기도 무섭기는 했지만, 적어도 죽을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아니, 살짝 죽을 것 같기는 했나. 아무튼 그보다는 나았다.
다른 여행자들은 또다시 바위를 오르기 시작했다. 역시 다이나믹 외국인들. 나는 그들과 반대로 움직였다. 적당히 평평하고 커다란 바위를 찾아 자리를 잡았다.
등반을 하고 싶지 않기도 했지만, 내게는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발에 박힌 가시를 빼는 일.
아까부터 따끔거리던 곳을 살펴보니 아무래도 가시가 박힌 게 맞는 것 같았다. 손톱으로 눌러보고, 이리저리 만져보고, 다시 눌러보기를 반복했다. 한참을 씨름한 끝에 간신히 작은 가시 하나가 빠져나왔다.
그제야 해방된 기분.
와이파이도, 데이터도 터지지 않는 볼리비아의 고원 한복판에서 나만 혼자 서바이벌을 찍고 있었다.
그래도 가시를 빼고 나니 주변의 풍경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주위의 풍경은 전날과는 사뭇 달랐다.
전날엔 식물 한 포기 찾아보기 어려운 척박한 고산 지대를 주로 지났다. 끝없이 펼쳐진 흙빛 땅과 바위산은 마치 다른 행성에 와 있는 듯했다.
반면 이번에는 물이 있는 곳을 따라 풀들이 자라고, 그 주변에서 동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모래와 자갈이 뒤섞인 길 위로 차가 한 대 지나갔다. 바퀴가 지나간 자리에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먼지는 금세 가라앉지 않고 연기처럼 길게 늘어져 차의 뒤를 따라갔다. 굽이굽이 이어진 길을 따라 그 흔적도 천천히 휘어졌다.
길옆으로는 짙푸른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 주변에는 풀이 자랐고, 라마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거나 물을 마시고 있었다.
전날의 풍경이 생명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낯선 행성 같았다면, 지금의 풍경은 그 척박한 땅에서도 살아가는 것들을 보는 느낌.
그렇게 관광을 마친 우리는 차에 올라, 척박한 고원 곳곳에 생명이 피어나는 이색적인 풍경을 지나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