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혼자 떠나는 남미 여행기
밤새 따뜻한 물주머니를 품에 안고 잤다. 하지만 밤이 지나고 눈을 뜨자마자 밀려온 것은 지독한 추위였다. 나는 두꺼운 이불 몇 겹을 애벌레처럼 둘둘 감은 채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될 참이었다. 오늘은 새로운 팀원들과 함께 투어를 떠나는 날이기도 했다.
긴장 반, 추위 반. 그렇게 이른 아침부터 지친 몸을 이끌고 식당으로 향했다.
역시 투어라 그런지 아침밥도 잘 나왔다. 아침, 점심, 저녁을 꼬박꼬박 챙겨주는데, 매 끼니 배가 부를 정도로 음식이 넉넉했다.
특히 이날은 아침 식탁에 놓인 하얀 가루가 나를 반겼다.
처음에는 소금인 줄 알았다. 작은 플라스틱 통에 가득 담겨 있었으니 소금이나 설탕이겠거니 했다. 다만 설탕이라기에는 반짝임이 없어서 소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걸 가리키며 '밀크(Milk)'라고 했다.
우유라고?
아, 전지분유!
그렇다.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전지분유였다.
어린 시절 전지분유를 숟가락으로 퍼먹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전지분유는 물에 타 먹는 것보다 가루 자체가 훨씬 맛있다. 입안에 넣으면 처음에는 텁텁하다가도 침과 섞이면서 고소하고 달콤한 맛이 퍼진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는 칼로리가 신경 쓰여 마음 놓고 먹지 못했는데.
그런데 남미의 고산지대에서 전지분유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덕분에 즐거운 아침 식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맛있는 분유라도 해결해 주지 못하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인터넷이었다.
와이파이가 안 됐다.
정확히는 데이터도 안 됐다.
아니, 이럴 거면 내가 와이파이는 왜 구매했고, 무제한 데이터는 왜 샀는데?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안데스 고원지대라 통신이 원활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짜증이 나지 않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하물며 마을에 도착해서도 데이터가 터지지 않는다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아침 7시쯤에는 잠깐 연결되기도 했다. 그때 가족들에게 잘 다니고 있다는 연락을 남겼다. 혼자 남미를 여행하는 만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아, 출발할 때나 이동 중에, 또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틈틈이 안부를 전하곤 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출발한다는 말만 한마디 더 보내면 됐는데, 그사이에 통신이 다시 끊겨 버린 것이다.
한동안 휴대전화 화면만 들여다봤다. 그렇지만 화면 오른쪽 위의 데이터 표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제발, 우유니에 도착하면 터져라.
결국 나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차창 밖 풍경은 전날과 사뭇 달랐다.
여전히 황량했지만, 황량함에도 종류가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흙빛 평원 사이로 거대한 바위들이 솟아 있었다. 붉거나 갈색을 띤 암벽은 여기저기 깎이고 파여 있어, 누군가 일부러 모양을 만들어 놓은 것처럼 보였다.
미국 그랜드캐니언으로 가던 길에 봤던 풍경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곳에서도 바람과 오랜 세월이 암석을 깎아 만든 지형들을 만났었다. 거대한 암벽과 층층이 쌓인 지층, 흙과 돌이 뒤섞인 풍경이 어딘가 닮아 있었다.
다만 이곳에는 초록색이 조금 더 많았다.
정확히 말하면 초록색 덩어리들이 있었다.
메마른 흙 위로 낮고 둥근 풀들이 군데군데 솟아 있었다. 멀리서 보면 누군가 황량한 대지 위에 녹색 쿠션을 띄엄띄엄 놓아둔 것 같았다. 나무 한 그루 보기 어려운 고원이다 보니 그 작은 풀 덩어리들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이곳은 볼리비아 남서부의 안데스 고원, 알티플라노(Altiplano)라 불리는 지역이었다. 고도가 높고 건조한 데다 일교차까지 크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곳의 식물들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부드럽고 무성한 잔디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풍경만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내 체력도 확연히 달랐다. 차에서 내려 조금만 걸어도 쉽게 지쳤다. 가슴 한구석이 답답했고, 별로 힘든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몸이 무거웠다.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는 와중에 풍경을 감상하고, 사진을 찍고, 다시 차에 올라타기를 반복했다.
여행이라는 건 참 이상했다. 돈을 내고 먼 곳까지 와서 평소보다 춥고, 숨도 차고, 인터넷도 안 되는 생활을 자처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차창 밖을 내다보면 또 좋았다.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렇지만 뭐, 이게 여행이지.
오전 11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나는 마침내 그 풀 덩어리들의 정체를, 정확히는 녀석들이 얼마나 만만치 않은 존재인지를 몸소 깨닫게 되었다.
이번에는 초록색이 아니라 갈색이었다.
멀리서 봤을 때는 갈대 비슷한 풀이 둥글게 모여 있는 것 같았다. 빳빳한 잎들이 사방으로 뻗어 있었는데, 꼭 트롤의 머리카락처럼 생겼다. 머리 위로 뾰족뾰족 솟은 갈색 머리카락을 아는가. 마치 그런 머리를 한 트롤들이 땅에 얼굴을 묻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궁금했다.
과연 촉감은 어떨까?
나는 별생각 없이 손을 뻗었다.
아팠다.
내가 생각한 잔디가 아니었다.
부드러운 털도 아니었고.
굵고 뾰족한 잎들이 위로 솟아 있었는데, 손으로 건드려 보니 생각보다 훨씬 단단했다.
아이고야.
나는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녀석을 바로 옆에 두고 근처 돌에 걸터앉았다. 생각했던 것만큼 부드러운 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풍경을 바라보며 잠깐 쉬고 싶었다. 겸사겸사 신발에 들어간 모래도 털어 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신발을 벗고 모래를 털어 내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발가락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악!"
깜짝 놀라 발을 살펴보니 네 번째 발가락 부근이었다.
뭔가에 찔린 것 같았다.
설마 가시가 박힌 건가?
나는 급하게 발가락을 살폈다. 눈에 보이는 가시를 찾아 빼내려고 애썼지만, 피만 날 뿐 정작 가시가 빠진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해발 수천 미터의 고원 한복판에서 발가락에 가시가 박혔을지도 모른다니.
라파스에 가서 병원을 찾아야 하나?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대로 가시가 남아 있으면 어떡하지? 염증이 생기면? 남은 여행은?
별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그렇다고 투어를 중단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나는 아픈 발가락에 최대한 힘이 실리지 않도록 발 바깥쪽으로 땅을 디디며 일행을 따라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난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발가락 따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탈리아 페르디다(Italia Perdida)'라고 불리는 장소였다.
스페인어로 '잃어버린 이탈리아'라는 뜻이다.
이름부터 이상하지 않은가. 볼리비아에 웬 이탈리아?
가이드는 이곳의 이름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래전 한 이탈리아 여행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이 지역을 여행하다가 오토바이를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것을 찾으러 다니다 우연히 이 아름다운 바위 지형을 발견했다는 이야기였다. 정확히 어떤 경위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그런 내용이었다. 실제로 이탈리아 페르디다에는 이탈리아 여행자가 길을 잃었다거나, 이곳에서 실종되었다는 등 여러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한다.
이곳의 바위들은 일반적인 산과는 모습이 달랐다. 낮고 넓은 땅 위로 커다란 암석들이 제각각 솟아 있었다. 어떤 것은 탑 같았고, 어떤 것은 거대한 동물처럼 보였다. 오랜 세월 바람과 침식이 빚어 놓은 바위들은 하나같이 기묘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분명 아름다운 곳이었다. 광활하고, 황량하고, 바위로 만들어진 자연 속 공원 같기도 했다.
문제는 가이드가 걷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바위들 사이를 지나던 가이드가 갑자기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응?
저길 올라간다고?
눈앞에 있는 건 산바카라로가 아니라 거대한 바위였다. 당연히 제대로 된 계단이나 난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가이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바위를 타고 올라가는 게 아닌가.
다른 여행자들도 하나둘 그 뒤를 따랐다.
아니, 잠깐.
왜?
왜 올라가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면 그냥 아래에서 보면 안 되는 걸까?
도대체 무엇을 더 보겠다고 저 위까지 올라가야 하는 거지?
망설여졌다. 그러나 이미 사람들은 올라가고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나 혼자 아래에 남아 있기도 애매했다. 결국 나도 분위기에 휩쓸려 바위를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했다.
아니, 이건 아니지.
왜 절벽을 오르는데.
누가 나한테 절벽을 오른다고 말해 줬어?
아무도 그런 말 안 했잖아.
발 디딜 곳을 찾아 바위에 발을 올리고, 손으로 돌을 붙잡아 몸을 끌어올렸다. 평지를 걷기만 해도 숨이 차는 고산지대였다. 게다가 조금 전에는 발가락에 가시까지 찔리지 않았던가.
나, 지금 대체 뭐 하는 거야?
그렇게 어떻게든 정상에 올라서기는 했다. 위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분명 아름다웠다. 누런 땅 위로 크고 작은 바위들이 흩어져 있었고, 그 너머로 광활한 고원이 펼쳐졌다. 흙빛과 바위색, 하늘의 파랑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왔다.
평소였다면 한참을 서서 감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의 나에게는 풍경을 감상할 여유가 별로 없었다.
왜냐하면.
이제 내려가야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