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혼자 떠나는 남미 여행기
“Buenos días.”
“Hola. Encantada~.”
투어 참여자부터 가이드까지 모두 스페인어로 이야기하자 적잖이 당황했다. 설마 계속 스페인어만 들리는 건 아니겠지?
( 남미 여행을 다녀온 뒤 스페인어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 듀X링고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위의 대화는 초반에 배운 인사말이다. 이날 실제로 이런 인사를 나누었는지는 모른다.)
'하하~. 저 정도는 영어 하실 거예요~.'
웃으며 말하던 투어사 사장님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분명히 스페인어를 못한다고 말했고, 가이드가 영어를 할 수 있는지도 물었는데. 나를 냅다 스페인어 투어에 넣은 건 아니겠지……?
처음에는 곧 영어로도 설명해줄 거라고 기대했다. 보통은 스페인어로 설명한 뒤 영어로도 같은 내용을 알려주었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뭔가 중요한 설명을 하는 것 같았다. 참여자들은 웃으며 대답까지 하는데, 나는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하……. 그렇다. 스페인어 투어였다. 100퍼센트 스페인어 투어.
나는 스페인어를 전혀 못했다. 조금 서툰 정도도 아니고, 전혀. ‘계산서 주세요’, ‘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 같은 기초 표현만 급하게 외워왔지만, 암기와 멀어진 지 오래인 내 머릿속에는 그마저도 좀처럼 남아 있지 않았다. 즐겁게 웃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도 어색하게 웃었다. 제발 나를 두고 가지 마세요. 정보들은 못 알아듣더라도 여행의 핵심 내용들을 못 알아들을까봐 걱정이 되었다. 특히 몇 시까지 어디로 오라는 중요한 이야기는 더더욱. 그런 말을 놓치면 어떻게 될지……. 미아가 된 나를 상상하면서 흔들리는 차창에 몸을 기댔다.
홀로 여행의 결말을 비관하고 있는데, 옆자리 어르신이 아몬드를 건네주셨다. 감사하게도. 나는 어설픈 스페인어로 “Gracias”를 연신 말하며 아몬드를 입에 넣었다. 걱정 중에도 아몬드는 맛있었다.
오전 7시 40분, 아침 식사를 위해 차에서 내렸다. 차 밖에 상이 차려져 있었다. 평소라면 여행지에서 먹는 야외 아침 식사라니 꽤 낭만적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그날은 낭만은 무슨. 괴롭기 그지없었다. 사막의 아침은 정말 미친 듯이 추웠고, 뜨거운 음료를 손에 쥐고 있어도 몸은 좀처럼 따뜻해지지 않았다.
이렇게 추운데 꼭 밖에서 먹어야 하나요.
샌드위치도 있었지만 별로 당기지 않았다. 배고픔보다 추위가 괴로웠다. 판초를 여미고 커피를 마셨다. 도대체 몇 도인 걸까. 여기가 얼마나 추운지 알아야 우유니의 추위도 가늠할 텐데…….
실은 우유니의 밤과 새벽이 몹시 춥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은 터라 걱정이 앞섰다. 벌써 이렇게 추운데, 우유니가 이보다 더 추우면 어떡하지. 나는 정말 못 버틸 것 같은데. 판초를 샀기에 그나마 견디고 있었지, 없었다면…….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참고로 당시 나는 반팔 한 장 위에 바람막이, 경량 패딩, 판초까지 입고 있었다. 오후에는 사막이 반대로 무척 더워지니 겉옷을 벗으면 되겠다고 생각해서 반팔을 입었는데, 잘못 판단한 걸까. 우유니에 가기 전에 긴팔을 어떻게든 공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차에 올라 얼마 지나지 않아 옆자리 아주머니들이 여권과 PDI(입국 신고서 종이 영수증)를 준비하라고 알려주셨다. 내가 알아듣지 못하자 손짓과 몸짓으로 설명해주셨다. 그냥 내버려두셔도 될 텐데, 참 친절하셨다. 혹시 여권에 꽂아둔 PDI를 말하는 건가 싶어 꺼내 보여드리자,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잘 보관하라는 손짓을 하셨다.
칠레에서 볼리비아로 국경을 넘는 과정은 생각보다 길었다. 무장한 군인들이 차를 세웠을 때는 운전기사분만 무언가 설명했고, 우리는 내리지 않은 채 기다렸다. 그다음에는 출국 심사장에 내려 줄을 섰다. 여권과 PDI를 보여주고 칠레에서 출국했다. 한참을 더 가서 볼리비아에 입국할 때도 한 사람씩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또 차에서 내려 이번에는 건물 밖에서 QR과 여권을 보여주고 관문을 통과했다. 근처 건물로 걸어가 이름을 적고 150볼리비아노를 내자 입장권을 받았다. 아마 국립공원 입장권까지 이어서 구매한 것 같았다. 내리고, 줄 서고, 다시 타기를 반복하다 보니 지금이 몇 번째 절차인지도 헷갈렸다.
그사이 옆자리 아주머니들은 귤도 나눠주셨다. 알고 보니 투어는 차량 두 대로 진행되었고, 내가 탄 차에서는 나를 제외한 다섯 분이 모두 일행이었다. 나만 혼자인 데다 다들 나보다 열 살에서 스무 살쯤 많아 보여 괜히 뻘쭘했다. 무엇보다 나만 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최대한 눈치껏 움직이면서 일행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입장권을 먼저 구매하고 건물 안에 들어가 있었는데, 아주머니들은 내가 없어진 줄 알고 찾으셨다고 했다. 나를 발견하고 나서야 안도하시며 귤을 건네주셨다. 함께 출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말도 안 통하는 나를 이렇게 신경 써주시다니. 나는 웃으며 연신 그라시아스를 말했다.
오전 10시가 넘어 호수에 도착했다. 청록색 물 위로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호수를 둘러싼 산에는 갈색을 비롯해 여러 색이 섞여 있었다. 산과 호수의 경계가 또렷했고, 오래 바라보고 있어도 어쩐지 낯설었다.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도 필터를 씌운 듯한 물빛이 좀처럼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청록색이라는 이름은 혹시 여기서 가져온 게 아닐까.
돌에서 얻는 염료가 있다는 건 알면서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이 호수를 보고 저 색을 그림에 담고 싶어 했을 것만 같았다. 그만큼 아름다웠다.
그때 바람이 불었다.
……다시 시작이었다. 아름다운데 추운 비극.
여전히 반팔 위에 바람막이와 경량 패딩을 입고, 판초를 두른 데다 모자까지 쓴 상태였다. 이렇게 여러 겹을 입었는데. 심지어 10시도 넘었는데. 이렇게까지 추울 일인가.
풍경을 더 보고 싶어서 밖에 머물고 싶은 마음 반, 너무 추워서 차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반이었다. 그러다 돌아가고 싶은 쪽으로 저울이 기울었다.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도대체 이 정도로 입었으면 좀 봐줘야 하는 것 아닌가.
가이드의 이름은 조니였다. 이제 이름은 알았지만 조니의 설명은 여전히 알아듣지 못했다. 스페인어를 쓰는 아주머니 다섯 명 사이에서 나는 차 뒤쪽 좌석에 앉아 길고양이마냥 계속 간식을 받아먹었다.
이분들은 틀림없이 E일 것이다. 어색함을 온몸으로 뿜어내고, 그 어색함을 감추려 괜히 더 과장해서 웃는, 말도 안 통하는 동양인을 이토록 챙겨주시다니.
차창 밖으로는 이국적인 풍경이 계속 이어졌다. 여우도 봤다. 처음에는 개인 줄 알았지만 자세히 보니 여우였다. 역시 남미……. 여러 색이 드러난 산들도 차례로 나타났다. 며칠 뒤 가려고 계획한 비니쿤카를 닮았다고 생각했지만 이름은 알 수 없었다. 사슴인지 무엇인지 모를 동물들도 걸어가고 있었다.
설명을 알아들었다면 무슨 동물인지 알았을 텐데……. 몇 번이고 번역기를 돌려보았지만, 데이터도 안 터지는 사막에서 오프라인 번역기로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에는 한계가 있었다.
다양한 색의 돌과 낯선 동물들. 궁금한 건 많은데 검색도 못 하고 설명도 알아듣지 못했다. 답답해하다가도 창밖을 보느라 잠시 잊곤 했다. 차가 멈출 때마다 이번에는 어떤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까 기대되기도 했다. 여전히…… 밖은 추웠지만.
마침내 폴케스 온천에 도착했을 때도 바깥 공기는 차가웠다. 이 추위에 옷을 벗고 물에 들어가야 한다니. 오전 내내 판초까지 두르고 떨었던 나로서는 선뜻 내키지 않았다. 들어갔다가 나올 때는 또 얼마나 추울까. 추운 게 싫어서 집에서도 이불을 꽁꽁 싸매고 사는 나인데.
그런데 막상 몸을 담그자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