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혼자 떠나는 남미 여행
아, 따뜻해.
물속으로 조금 더 들어가 앉았다. 하루 종일 긴장하느라 어깨에 들어가 있던 힘이 저절로 풀렸다. 얼굴에는 찬 공기가 닿고, 물에 잠긴 몸은 따뜻했다.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 따뜻한 해류와 차가운 해류가 만나는 조경 수역에는 물고기가 많다더니. 이유는 다르겠지만, 인간인 나도 따뜻한 물과 차가운 공기가 만나는 이곳이 퍽 좋았다.
심지어 풍경도 아름다웠다. 멀리 펼쳐진 호수와 그보다 더 멀리 솟은 산들. 고개를 돌릴 때마다 탁 트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보다 고개를 뒤로 젖혔다. 온천 가장자리의 단단한 테두리에 머리를 기대니 뒷목까지 따뜻한 물에 잠겼다.
이게 낭만이지.
물론 이 낭만을 누리기까지는 약간의 우왕좌왕이 있었다.
죄다 스페인어뿐인 이곳에서, 차에서 내린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부터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이 돈을 챙기길래 나도 슬쩍 지폐를 꺼내기는 했지만, 티켓은 어디서 사야 하는지, 옷은 어디서 갈아입어야 하는지 도통 모르겠었다. 그렇다고 일상복을 입은 채 온천에 냅다 뛰어들 수도 없고…….
사람들이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나는 눈동자만 바쁘게 움직였다. 머릿속에서는 계속 같은 말이 맴돌았다.
‘뭔 말이여…….’
사람들이 바라보는 곳을 번갈아 살피고 있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KIM!”
아주머니들은 나를 ‘KIM’이라고 부르셨다. 처음 이름을 물어보셨을 때 내 이름을 알려 드렸지만, 발음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냥 ‘KIM’이라고 불러 달라고 했더니 이름이 참 쉽다며 좋아하셨다.
이번에도 내가 못 알아들었다는 걸 눈치채신 아주머니들이 영어 단어 몇 개와 손짓을 섞어 설명해 주셨다. 티켓은 저기서 바꾸고, 가격은 얼마고, 옷은 저쪽에서 갈아입으면 된다고.
전 세계 어디서든 통하는 몸짓이 있다. 자기 몸을 위아래로 훑으며 옷을 잡아 보이면, 아, 옷을 갈아입으라는 말이구나 하는 식이다. 아주머니들은 풀이 두 개 있다는 것과 어느 쪽이 더 뜨거운지도 알려 주셨다.
그렇게 도움을 받아 들어온 온천이었다. 몸을 담그고 나니 그동안의 곤란이 죄다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말이 통하지 않아 끊임없이 눈치를 봐야 하지만, 뭐 어떤가. 사람들은 친절하고, 풍경은 아름답고, 물은 이렇게 따뜻한데.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기대어 있었다.
어느덧 먼저 들어와 있던 다른 투어 팀 사람들이 떠나고,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휴대폰을 확인하니 열한 시 오십사 분이었다.
조금 전 아주머니가 알려 주셨던 시간이 생각났다.
“KIM! Twelve, half.”
아주머니들 중에는 영어를 조금 하실 수 있는 분이 계셨다. 그분은 내가 알아듣지 못하고 있으면 틈틈이 영어 단어를 섞어 설명해 주셨다. 이번에는 열두 시 반까지 돌아오라는 뜻으로 알아들었는데, 확신은 없었다. 우리 팀 사람들은 나갈 생각도 없이 여전히 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혹시 내가 잘못 알아들었나?
그래도 늦는 것보다는 낫겠지. 일단 옷부터 갈아입고, 시간이 남으면 온천에서 바라보던 호수 가까이 가 보기로 했다. 구경하면서 우리 팀 사람들이 움직이는지도 살피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애증의 수영복과도 여기서 작별했다. 여행을 위해 준비한 물건 중 일부는 다 쓰고 버려 짐을 줄일 생각이었는데, 수영복도 그중 하나였다. 아마존에서 한 번, 여기서 한 번. 이렇게 끝. 집에도 수영복이 있었고, 애초에 그러려고 저렴한 것을 샀으니 아쉬움은 없었다. 여기까지 와서 온천에도 들어갔으니 제 할 일은 충분히 한 셈이었다.
잘 썼다. 안녕.
그렇게 홀가분해져서 걷다가 멀리 동물 무리를 발견했다.
사슴인가?(지금은 그것이 구아나코라는 걸 안다. 라마 같이 생긴 야생 동물.)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보고 싶었다.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고 지나가기에는 아쉬웠다. 휴대폰을 확인하니 열두 시 이십 분. 약속 시간이 열두 시 반이라면 십 분 정도 남아 있었다.
다녀올 수 있겠는데?
그때의 나는 아주 자신 있었다. 마침 같은 팀 사람 한 명도 느긋하게 풍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혹시 시간을 잘못 알아들었더라도 저 사람을 보며 돌아가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혼자 너무 일찍 돌아가서 기다리는 것도 좀 그러니까.
그리고 냅다 뛰었다.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사진도 찍고 얼굴도 자세히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동물들은 이름이 무엇이든 귀여웠다. 가까이 가서 사진을 찍고, 잠깐 구경하다가 이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돌렸다.
그런데 아까 그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망할.
시간을 가늠하려고 슬쩍 봐 두었던 그 사람이 사라지니 마음이 급해졌다. 올 때처럼 뛰고 싶었지만, 이미 숨이 차서 빠른 걸음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너무 힘들었다.
고작 이 정도 움직였다고 이렇게까지 힘들 일인가. 온천에서 기껏 풀어 놓은 몸이 금세 지쳐 버렸다. 그래도 처음 들었던 시간에는 맞춰야 한다는 생각으로 부지런히 걸었다.
차가 있는 곳까지 왔을 때는 조금 안심했다. 이제 타기만 하면 되겠지. 익숙하게 생긴 차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그런데 우리 차가 아니었다.
아, 여기 아니구나.
우리 차는 지붕에 노란색 커버로 덮은 짐을 싣고 있었다. 이 차에도 똑같이 노란 커버가 있기에 당연히 우리 차인 줄 알았는데…….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쪽에도 노란 커버를 씌운 차가 있었다.
기껏 시간 맞춰 와 놓고 남의 차 문을 열다니!
결국 일이 분쯤 늦었다. 게다가 돌아가야 할 곳은 차도 아니었다. 근처 건물이었다. 차 쪽으로 다가가자 같은 팀 아주머니들이 건물 입구에서 손을 흔들고 계셨다. 왜 그곳에 모여 있는지는 몰랐지만, 일단 또 뛰었다.
아주머니들은 괜찮다며 손짓하셨다. 천천히 오라는 뜻 같았지만, 이미 늦었다고 생각한 나는 멈출 수 없었다.
더 늦어서는 안 돼…….
다행히 나보다 더 늦게 오신 분들이 있었다. 그분들이 나타나는 순간 얼마나 반갑던지. 평소 같으면 누가 늦는지 신경도 쓰지 않았을 텐데, 그때만큼은 정말 안심이 됐다. 나 혼자 모두를 기다리게 한 건 아니구나 싶어서.
그런데 건물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은 뒤에도 숨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왜 이렇게 힘들지 생각하다가 뒤늦게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다.
여기, 해발 사천 미터가 넘는 고산지대였지.
그걸 잊고 동물을 보겠다고 냅다 달린 것이다. 평소보다 조금 더 힘든 정도가 아니었다. 사슴인지 뭔지 구경하러 뛰기 전에 한 번쯤 생각했어야 했는데.
뭐, 이미 뛰고 돌아왔으니 어쩔 수 없지.
건물에 모인 이유는 식사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니 열두 시가 넘었으니 점심시간이기는 했다. 치킨과 바나나 구이로 보이는 음식, 파스타, 야채들이 나왔다. 하나씩 먹어 보니 치킨과 토마토가 맛있었다. 바나나도 괜찮았다.
면은 조금 애매했다. 씹으면서도 이건 무슨 맛으로 먹는 것인가 싶었다. 자연스럽게 치킨과 토마토 쪽으로 손이 갔다. 숨도 조금씩 가라앉고, 배도 차고, 그제야 주변을 편하게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밥을 먹고 나와 차 근처에 서 있는데, 아까 내가 뛰어가서 봤던 동물 무리가 이쪽으로 왔다.
그냥 기다렸으면 여기서 봤을 수도 있었겠네.
그래도 다시 보니 좋았다. 몇 번을 봐도 녀석들은 귀여웠다. 아까는 시간을 신경 쓰느라 오래 보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배도 부르고 차도 가까이 있으니 마음 편하게 구경할 수 있었다.
그중 한 마리가 모래에 누워 뒹굴뒹굴했다. 이쪽으로 몸을 굴렸다가 저쪽으로 굴렸다가.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자꾸 눈이 갔다. 이름도 모르는 동물을 보며 나는 이미 한껏 흐뭇해져 있었다.
아까 숨이 차도록 뛰어갔을 때도 귀여웠지만, 배불리 먹고 가만히 서서 보니 더 귀여웠다. 이제 저 녀석이 어디로 가든 조금 더 지켜볼 수 있었다. 굳이 뛰어가지 않아도 되는 거리에서.
저 녀석은 내가 자기를 보겠다고 고산지대에서 얼마나 힘들게 뛰었는지 모르겠지.
알 필요도 없겠지만.
나는 숨을 고르며 모래 위에서 뒹구는 녀석을 한참 더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