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혼자 떠나는 남미 여행
돌발 미션 등장!
[오후 2시, 달의 계곡 투어가 시작되기 전까지 아타카마에서 우유니로 가는 2박 3일 투어를 예약하라!]
일정상 다음 날 반드시 출발해야 했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투어를 잡아야 했다. 물론 여전히 기존의 업체에서 스페인어 투어를 참여할 수 있는 선택지는 남아있었지만 전날 별 투어에서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었다. 영어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데 스페인어 투어라니. 온통 스페인어를 쓰는 사람들 세상에서 영어만 쓸 수 있는 자의 무력함을 여실히 깨달은 뒤였다. 게다가 사전 예약한만큼 70만원 즈음 하는 거금을 들인 투어였다.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그 거금을 내고 갈 수는 없지. 최대한 빨리 다른 투어사를 찾아 예약하고, 기존 업체에서 환불을 받아야 했다.
다행히 새 투어는 생각보다 쉽게 구했다. 2박 3일 일정이라, 없으면 어떡하나 걱정이 많았는데 즐비한 투어사들은 다행히 내 고민을 빠르게 해결해주었다. 후기를 찾아보고 몇 군데를 골랐었지만, 그곳들은 아쉽게도 다 아웃. 그렇지만 적당히 골라 들어간 다른 여행사에는 자리가 있었다. 주인분과의 영어로의 대화가 잘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소통은 다 되어서 안내도 무리 없이 받았다. 카드 수수료 19퍼센트를 포함해 261,800페소(36만원 가량). 주인분도 친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이드와 영어로 소통이 될까 물었더니, 자신처럼 영어를 잘은 아니라도 어느정도 할 수 있다고 들어서 결정했다.
그렇게 예상했던 시간보다 빨리 투어를 정하고 난 뒤에는 이제부터 준비물을 준비해야 했다. 준비물은 수영복과 물 5리터, 휴지, 그리고 400볼리비아노였다. 추천받은 환전소에 가서 가진 페소를 거의 다 털어 환전했다. 가게에 들어가려다가 번역기에 정신이 팔려 입구 앞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주변 사람들이 달려와 나를 일으켜 주는 민망한 상황이 있긴 했지만…….
전날 추위에 떨었던 기억이 나 판초도 샀다. 커다란 라마 인형이 서 있는 가게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발견했는데, 제일 큰 건 생각보다 너무 커서 적당한 크기로 골랐다. 숙소에 잠시 돌아왔다가 물과 휴지를 사야 한다는 걸 뒤늦게 떠올리고 마트로 향했다.
마트로 가면서도 계속 준비물을 적어둔 종이를 확인했다. 물 5리터라니. 1리터를 잘못 들은 건가, 1리터짜리 다섯 병을 사라는 뜻인가 잠시 고민했다. 마트에 도착해서야 알았다. 정말 5리터였다. 선반에는 커다란 물통이 놓여 있었고, 가게 주인분께 정말 투어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커다란 물통을 사가냐고 묻자 그렇다고……. 나도 낑낑 거리며 그 물통을 사들고 숙소로 다시 돌아갔다.
진짜 무거운데. 이걸 어디다 쓰는 거람.
오후에는 원래 계획했던 달의 계곡 투어를 갔다. 마을에서 조금만 벗어났을 뿐인데도, 마을의 흙빛 풍경은 어느새 거칠고 낯선 지형으로 바뀌었다. 달의 계곡은 이름 그대로 달 표면을 닮은 곳이라기보다, 오랜 시간 바람과 물이 깎아 놓은 소금과 암석의 계곡에 가까웠다.
이곳은 소금 산맥, ‘코르디예라 데 라 살’ 안에 있다. 눈앞의 산등성이에는 퇴적층이 구겨지고 솟아오른 흔적이 드러나 있었고, 바위 사이로는 소금과 석고 같은 광물이 언뜻 비치고 있었다. 이 지역의 소금 지형은 오래전 염호가 마르며 쌓인 퇴적물이 압축되고 접혀 만들어졌다고 한다.
가이드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돌을 보여 주며 셀레나이트라고 설명했다. 이름은 달의 여신 셀레네에서 왔다고 했다. 거친 갈색 바위 한가운데 놓인 돌은 희고 반투명한 결을 띠고 있었다. 설명 없이 봤다면 조금 희끗한 돌멩이로 지나쳤을 텐데,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정말 달의 조각처럼 보였다. 전날 별밤 투어에서 별자리 이야기를 잔뜩 들은 탓일까?
달의 계곡을 둘러싼 산맥 이야기도 들었다. 가까운 소금 산맥 너머로 도메이코 산맥과 안데스 산맥이 이어진다고 했다. 세 산맥이 한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광활했다. 멀리까지 이어지는 황량한 능선과 모래언덕을 보고 있자니 그랜드캐니언이 떠올랐다. 예전에 친구와 무박 2일 투어로 짧게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곳도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천천히 봤으면 좋았을 것 같다. 칼라마에서 아타카마로 오는 버스 안에서 스치듯 본 풍경과도 전혀 달랐다. 직접 걷고 오래 바라보니 이곳의 아름다움과 삭막함이 비로소 제대로 전해지는 듯했다.
그러나 풍경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던 건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정상까지였다. 정상에서부터 불안 불안 했었는데, 정상에서 내려가는 길부터는 아주 무서웠다. 폭이 좁고 발밑은 자갈과 모래투성이였다. 파도가 멈춘 바다처럼 보이는 절벽 너머로 펼쳐진 어두운 모래 산맥이 금방이라도 나를 삼켜버릴 것만 같은 기분. 아침에 넘어졌던 기억까지 더해져 발을 내디딜 때마다 괜히 조심스러웠다. 가이드가 무섭냐고 물어 그렇다고 대답했지만, 정말 가기 싫을 정도로 무섭다는 말까지는 못 했다. 안 가면 어쩌겠어. 이미 내려가는 길에 들어섰는데.
하산한 뒤 신발을 벗자 모래가 쏟아졌다. 발끝에서 모래가 느껴질 만큼 들어 있었다. 5센티쯤 되는 모래 깔창을 끼고 있는 기분이었다. 차에 타기 전에 털었더니 모래가 끝없이 흘러 나왔다.
이어 소금 광산과 광부들이 살던 집을 둘러봤다. 이곳에서는 소금을 캐냈고, 집을 지을 때도 광산에서 얻은 소금 덩어리를 사용했다고 한다. 식탁에 올리는 정제 소금이 아니라, 땅에서 캐낸 암염으로 집을 지었던 것이다. 광산의 흔적과 거친 산등성이를 보고 나니 달의 계곡이 그저 관광지가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일하고 살았던 장소라는 게 실감 났다. 한때 이곳의 소금 채굴은 산 페드로 지역 공동체의 생업이었다고 한다.
마지막에는 노을을 보러 갔다. 광활한 고원에 도착하니 아래쪽에서는 사람들이 말을 타고 있었다. 간식과 주스, 술이 나왔는데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는 우선 망고 주스를 픽했다. 하지만 마시자마자 급 후회가 되었다. 여기 주스는 조식 때도 그렇더니 영 밍밍했다. 내 잔이 비어있는 것을 본 가이드가 CAMPANARIO라는 칠레 술을 권유해 주어서 술을 마셔보았다. 달달하니, 칵테일스럽고 좋았다. 노을을 바라보며 마시고 있자니 취기가 기분 좋게 올랐다. 평소에 술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또 이런 곳에서 한 잔 하는 것은 기분이 다른 것 같기도 하다. 햇빛이 산등성이를 비추자 갈색 바위들이 조금씩 붉고 부드러운 빛을 띠었다. 낮 동안 메말라 보이던 계곡이 노을 속에서 천천히 물들었다.
그렇게 기분 좋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다음 날은 드디어 2박 3일 우유니 투어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새벽 출발이라 일찍 일어나 기다리다가 연락을 받고 서둘러 가이드를 만나러 나갔다. 그런데 투어 차량에 올라타자마자 충격적인 상황을 맞닥뜨렸다.
나는 어버버 하며 물었다.
“Only Spanish tour?”
아무도 영어를 하지 않았다. 가이드도 운전기사도, 나보다 먼저 차에 타 있던 다른 참가자들도 스페인어만 했다. 누군가 중요한 설명을 하는 것 같은데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무 말도 알아들을 수 없는데, 어떻게 여행을 하지?
외롭고 피곤한 3일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