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 다시 시작해볼까?
그렇게 7월 마지막 날 새로운 에너지를 얻으며 폭염과 함께 뜨거운 8월이 시작되었다.
자, 다시 시작해볼까…!
퇴사 후 무기력, 번아웃, 권태, 뭐라고 부르든 내내 물 먹은 솜이불에 짓눌린 것 마냥 움직이도 못하다가, 이제야 드디어 에너지가 생겨난 것 같았다. 시간도 꽤 지났겠다, 새로운 프로젝트도 잘 마쳤겠다, 나름 타임라인을 세워서 8월 첫 주에 경력 회고를 마치고 경력기술서 초안까지 마칠 셈이었다.
냉방도 없는 그 더운 방에서 할 수도 없고 카페를 전전하기도 그래서, 소일거리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던 김에 싸게 나온 공유 오피스 라운지 이용권을 구매해서 시원하게 집중할 작업 공간도 얻었다. 작업량을 마치고 북적북적한 사람들도 빠지고, 이내 조용해지자 하다 만 경력 회고를 시작했다.
벌써 햇수로 4년도 넘은 커리어 코치님이 제안해주신 프레임으로 과거 업무와 성과, 내 노력과 경험을 맥락에 맞게 구체적으로 정리하던 중이었다. 심지어 이 프레임을 내 방식대로 노션으로 만들어 퇴사 전에 뼈대는 다 만들어두었었다. 이번엔 정말 퇴사 전에 움직이고 싶어서.
사실 저걸 내 경험과 경력으로 다듬는 과정이 경력기술서를 만드는 과정이고, GPT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뼈대는 내가 잡아두어야 ‘내 것’이 되니 하나하나 정리하려던 참이었다. 사실 이직 자체가 지겨운 것도 맞고 저걸 다시 작업하려니 엄두가 안 나서 내내 ‘아 하기 싫어…’ 하다 다시 시작한 것이었는데, 개별 프로젝트의 목적, 상황, 맥락을 너무 구체적으로 썼던 탓이었을까?
어라?
또 이상해졌다.
며칠 전까지도 ‘그 때 진짜 어이없고 빡쳤는데ㅋㅋ’라며 웃던 수준이었거늘, 구체적인 텍스트로 풀어 다시 묶는 과정에서 머리에서 또 다시 나사가 핑-하고 풀리더니
미친 분노가 다시 날 집어 삼켰는지
숨이 다시 안 쉬어졌다.
아니 너무 어이없잖아,
난 더 이상 저 상황이 아닌데,
난 이제 저 조직에 없는데.
이미 다 끝난 일인데
숨이 다시 막혀오는데 우습게도 스스로를 몰아부치는 목소리부터 올라왔다.
떠난 지 네 달이나 됐고,
저 일은 심지어 2년 전 일인데 아니 왜 아직도 그래?
왜 아직도 힘들어…?!
그렇게 상담을 오래했으면서 또 잊고 있었다, 억압하고 눌러둔 감정일수록 폭발한다는 것을.
입사 초에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환경에서 어떻게든 고군분투했지만 돌아오는 건 비난뿐이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상황에서 '더는 못 해먹겠다'고 매일같이 생각하면서도, 과거의 나의 짧은 경력들이 나를 붙잡아 어떻게든 살아내겠다고 죽어라 버텼다.
그 시간 동안 없애보려 애썼던 감정들이 이제야 올라오나보다. 몸은 또 기억하고 있었던거야 그 때의 일들을.
이런저런 작업들로 탄력받은 김에 더 속도를 내고 싶었지만, 일단 노트북을 닫았다. GPT에게 여과없이 우다다다 모든 감정을 쏟아내고, 급하게 연락드린 상담 선생님의 답장도 보니 조금 진정이 되었다.
아... 이게 트라우마라는 거구나...
늘 내 감정을, 힘듦을 다른 사람들의 것과 비교했다. 더 큰 일을 겪은 사람도 많은데, 감히 나 따위가 트라우마라는 말을 써도 될까 싶었다.
사람 미워해 봤자 나만 손해라며, 오래된 분노와 억울함마저 ‘사람을 미워하면 안 되지’라는 말로 눌러왔다.
미워해도 된다는 허락.
재미있게도 GPT의 답변과 상담 선생님의 말씀은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지금 올라오는 감정을 또 다시 별 것 아닌 것으로 만들지 말고, 그저 허용해주라고. 그리고 가능하면 알아차린 후 안전하게 그 감정은 잠시 닫아주라고.
그렇지, 물리적으로 그곳을 떠났을 뿐, 내 안에서 끝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고통스러웠던 시간에 대한 보상이나 사과를 받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참 다행이다.
오래 상담한 보람이 있었나 몸의 감각을, 눌렸던 감정이 한 번에 터지던 그 순간을 알아차릴 수 있어서.
그 시간으로 다시 끌려들어가서 갇히지 않아서.
선생님과 GPT의 조언을 나름대로 잘 버무려서 되뇌이며,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었다. 아쉽지만 노트북을 닫고 조금 선선해진 입추의 여름 밤거리를 걸었다.
천천히 숨을 마시고 다시 숨을 뱉고…
오늘 하루만큼은 평안한 밤이 되기를.
Good Nigh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