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추석 이틀 전이 추석날 새벽처럼 바쁘다. 시할머니 제사가 있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만나는 사람마다 “요즘 누가 제사를 지내니?” “아직도 명절 차례하고 합치지 않았어?”라고 한 마디씩 한다. 하지만 구순이 내일모레인 시어머니는 요지부동이다. 결혼 32년 차 프로 주부인 형님과 나는 여전히 어머니 말에 토를 달지 못하고 꼬박꼬박 제사와 차례 지낼 준비를 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다.
일주일 전부터 시장과 마트에서 산 과일과 고기, 전거리를 거실에 늘어놓았다. 머릿속으로 순서를 정한다. 우선 뭇국을 먼저 끓이고 전을 부치고 과일을 씻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30년 넘게 해 온 일인 데다 먹거리를 풍족해지면서 음식량을 많이 줄였지만, 다른 집보다 두 배로 음식을 장만해야 하는지라 종일 종종거려야 일이 간신히 끝난다. 그럴 때면 괜히 심통이 난다.
작은 배려로 지친 마음을 일으키다
어제도 그랬다. 30도를 웃도는 날에 뭇국을 끓이고 나니 얼굴은 벌겋고 이마엔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프라이팬에 녹두전을 부치기 시작하는데 벌써 기름 냄새가 싫었다. 기름기를 걷어가 줄 커피가 간절했다. 거기에 달달한 그 무언가가 함께 한다면 마음이 좀 편해질 것 같았다. 남편이 그 마음을 알아챘는지 커피콩을 갈기 시작했다. 집안에 커피 향이 그득해지자, 짜증이 가라앉았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가라앉았던 마음이 긍정 모드로 바뀌는 신호를 보였다. 하지만 부족했다.
“나, 당 충전이 필요해. 초코를 잔뜩 머금은 도넛 하나만 사다 줄 수 있어요?”
제사상에 올릴 닭을 사러 가던 남편이 눈을 찡긋하고는 집을 나섰다. 커피 한 잔에 힘을 얻은 나는 한 시간 동안 씨름하며 녹두전을 다 부치고 동그랑땡을 시작했다. 현관문 여닫는 소리가 나더니 남편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타났다. 남편 손에는 동네 빵집에서 식빵을 담아 오는 스테인리스 빵 용기가 들려있었다. 남편은 헤벌쭉 웃으며 개선장군처럼 용기를 열며 말했다.
“오늘 당신이 도넛 먹고 싶은 걸 알았나 봐. 딱 오늘만 반값 행사를 한 대. 게다가 통신사 포인트까지 이중으로 할인해 준다는 거야.”
하나만 사서 한 입씩 나눠 먹으면 되는데 어쩌자고 비싼 걸 이리 많이 사 왔냐고 내 입에서 잔소리 폭풍이 쏟아지려는 찰나였지만 나는 입을 다물었다. 용기에 가지런히 담긴 도넛은 그 어느 때보다 먹음직스럽고 예뻐 보였다. 도넛 가게에서 담아주는 종이 포장지와 냅킨을 거절하고 용기에 담아 온 것도 명절에 남들보다 두 배로 힘들게 일해야 하는 아내가 안쓰러워 무어라도 대접하겠다는 마음도 그 안에 함께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모험담을 펼쳐 놓듯 도넛 보따리를 여는 남편의 아이 같은 모습에 같이 장단을 맞춰 주기로 했다. “우와! 예쁘다! 어떻게 내 맘을 이렇게 잘 알았어?” 초콜릿이 잔뜩 묻은 도넛을 한입 먹으니 짜증 섞인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남편과 사이좋게 초코 도넛을 나눠 먹으면서도 잠시도 쉬지 않고 손을 놀리는 내 모습을 보던 남편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시장에 다녀올게.”
“어? 아직 안 다녀온 거야?”
“당신 먹고 힘내라고 도넛부터 사 왔지!”
남편은 도로에 차가 가득하다며 잠시 고민하더니 닭을 담을 용기를 가방에 넣고 어깨에 멨다. 나는 남편에게 손 인사만 하고 다시 프라이팬으로 눈길을 돌렸다. 전을 다 부치고 정리하려는데 남편이 돌아왔다. 남편은 도로도 그렇지만 시장 주차장에도 자리가 없을 것 같아 자전거를 타고 다녀왔다며 뜨끈한 닭강정이 든 용기를 꺼내 놓았다.
남편이 낸 용기로 가볍고도 풍성해진 추석
결혼하고 20년 넘게 머리가 붙어 있는 온전한 닭을 사다 찌거나 삶아서 제사상에 올려야 했다. 시어머니는 그렇게 해야 새벽을 알리는 닭의 상서로운 기운을 제대로 전해받을 수 있다고 하셨다. 하지만 몇 해 전, 갑자기 마음을 바꾸셨다. “우리도 이젠 식구들이 잘 먹는 음식으로 바꾸자!” 명절이 지나면 처지는 음식을 버리기도 힘들고 먹어 치우는 것도 큰 일이라고 도저히 안 되겠다고 하셨다. 그때 형님과 나는 눈짓을 교환하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처음엔 시장에서 제수용으로 파는 튀긴 닭으로 바꿨다. 하지만 기름진 명절 음식을 두 배로 먹어야 하는 추석에는 튀긴 닭조차도 인기가 별로 없었다. 한 번도 어머니 말씀을 거역한 적이 없던 남편이 큰 용기를 내서 재작년 추석에 아이들이 잘 먹는 닭강정을 올리면 어떻겠냐고 넌지시 여쭤보았다. 단번에 거절하실 줄 알았는데 어머니는 의외로 선선히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평소 입이 심심하면 들르던 시장의 유명 닭강정 가게 앞에서 추석 상에 올릴 닭강정을 기다리던 그때를 잊을 수가 없다. 남편과 나는 역시 오래 살고 봐야 한다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위해 쉴 틈 없이 닭을 튀기고 양념에 버무리며 종이 포장지에 닭을 담던 주인장은 우리가 내민 용기를 보더니 잠시 손을 멈췄다. 그리고 곧바로 선한 미소를 띠며 우리가 내민 용기에 닭강정을 가득 담아주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제사와 차례상 준비로 지쳤던 내 몸과 마음은 남편의 작은 배려로 다시 힘을 얻었다. 나는 전을 다 부치고 나서 냉장고에 있던 과일을 하나씩 꺼냈다. 한숨을 거둬내니 사과와 배, 감과 포도를 씻는 데 내 마음에 쌓여 있던 앙금까지 씻겨 나가는 것 같아 개운했다. 말끔하게 씻긴 내 마음이 전해졌는지 운전대를 잡은 남편의 모습도 아이들의 모습도 전에 없이 밝아 보였다.
#용기있는생활 #추석 #추석에도용기있는생활 #닭강정을용기에 #용기도넛 #배려와사랑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200362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