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품은 넉넉하니깐
이제 오전 10시인데도 이 집 저 집 실외기에서 내뿜는 열기가 뜨거움에 무게를 실었다. 나에게 시원하고 쾌적한 시간만 주고 싶어 17시간째 온 힘을 쏟고 있는 에어컨이 짠했다. 유리창에 손을 델 정도로 내리쬐는 햇살을 조금이라도 막으려고 거실 블라인드를 끝까지 내렸다. 그리고 에어컨을 껐다. 이젠 좀 쉬라는 말을 남기고 내가 집을 나섰다. 관리실 옆에 자리한 주민들 수다방인 ‘꽃 담소’에서 천 원으로 뽑은 뜨거운 행복을 들고 독서실로 갔다. 방학이라 그런지 학생일 법한 뒤통수들로 빈자리가 많지 않았다.
남편 온라인 게임 이동으로 한 명이 빠진 자리에 새로 영입한 독서클럽 회원을 환영하며 며칠 후 토론할 바카라. 『소년이 온다』를 가방에서 꺼내 바카라상 위에 폈다. 주름진 내 손이 바카라 표지를 쓰윽 흩었다. 벌써 3번째 읽는데도 여전히 무언가가 밀고 올라왔다. 바깥 날씨만큼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파트 독서실 천장에 붙은 에어컨은 새벽 6시에 하루를 시작한다. 그 덕분에 가슴 열기를 식히며 어제 읽다가 접어둔 페이지로 들어갔다.
여전히 살아서 팔딱거리는 가슴과 마른 목을 축이려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기분 탓인지 떫은맛이 났다. 마치 풋사과를 한입 베어 문 것 같아 얼굴을 찡그렸다. 구겨진 인상을 따라 이마에 더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나는 듬성듬성 빠진 머리카락을 긁어모아 나잇값을 제대로 하는 주름을 가렸다. 아차! 덕분에 더 휑해진 뒤통수는 어떡하지.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집과 거리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지지도 않는 저녁 속에서 우리들은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잠을 잡니다.’
나는 이 문장에서 또 발이 걸렸다. 읽을 때마다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콧물 정도는 흘려야지 넘어가는 대목이다. 그해 5월. 나는 그들의 죽음과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남편 죽음 후 내가 살아온 시간과 비슷한 이 문장을 만나면 늘 터덕거렸다. 마치 그들의 영혼이 아직도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나와 같이 있는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가슴에 끌어안고 어두운 저녁을 보내고 새 아침을 맞이하려 애를 썼다.
내가 활자에서 눈을 뗐다. 콧물 대신 눈곱이 낀 눈을 정리하듯 손수건으로 축축해진 눈을 닦았다.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앞자리에 내 뒤통수와 비교되는 까만 머리카락이 가득 찬 정수리가 보였다. 젊은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오늘과 다른 내일을 꿈꾸며 문제를 풀고 또 푸나보다. 볼펜 쥔 손가락을 따라 각진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 떨림을 따라 바카라 속에서 만난 그 시간을 살아보지 못한 어린 영혼들이 춤을 췄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모든 시간을 건너 평범한 날을 보내고 있는 내가 그들에게 다가가려 발을 내밀었다. 이제는 저녁이 지나면 반드시 아침이 온다는 것을 그들에게 진심을 다해 보여주고 싶었다. 게으르고 나태했던 나를 포장하듯 굵어진 손가락 매듭과 혈관이 가득한 부끄러운 손과 발이 들썩거렸다.
바다는 가슴을 치고, 바닷가를 때리고는 다시 얻어맞는다. 바다는 자유를 찾으려고 앞에 부옇게 드러나는 방파제를 무너뜨리고, 그 너머로 가기 위해 투쟁한다. 마른땅은 적막하고 안전하며, 순박하고 부지런하다. 땅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시든다. 그러나 흙으로부터 또다시 봄이 솟아날 터여서 대지는 안심을 하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어머니, 바다는 마음이 편치 않으니, 바다는 꽃도 피지 않고 열매도 맺지 못해서 밤낮으로 한숨을 짓고 투쟁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영혼의 자서전』 중에서
친구의 권유로 읽기 시작한 바카라과 『소년이 온다』가 자꾸 겹쳤다. 아마도 유년 시절 전쟁과 학살을 목격했던 니코스 카잔차키스 작가의 자유를 향한 갈망 때문인가 보다. 나는 다른 바카라으로 새나가는 정신을 붙잡고 다시 한강 작가에게 빠져들었다. 자음과 모음이 만나 뜻깊은 문장이 되었다. 길고 길었던 여름 해가 춤을 추는 영혼들과 손을 잡고 문장을 흔들어 바람을 불러들였다.
드디어 마지막 페이지까지 왔다. 목이 메고 콧물이 내 허락도 받지 않고 흘러내렸다. 그래도 다행이다. 오늘 잊지 않고 손수건을 챙겼으니깐. 이런 나를 칭찬하며 에어컨 바람에 식어버린 커피를 마저 마셨다. 떫은맛 대신 쓰디 쓴맛이 막힌 목을 제대로 뚫어 줬다. 드디어 숨구멍이 활짝 열렸다. 나는 에어컨에서 쏟아져 나오는 차가운 바람과 내 감정이 사그라들기 전 독서토론회 밴드에 올릴 독후감을 써 내려갔다. 축축해진 손수건을 꽉 쥔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