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른 마음으로
엘리베이터 바닥이 검은 얼룩으로 끈적하다. 어제저녁. 하루를 마친 누군가가 들고 있었을 휴식 같은 커피잔이 흔들렸나 보다. 살짝 졸았을까? 아님, 동료들과 아니 친구나 연인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마음이 지금의 나처럼 요동쳤던 걸까?
얼룩을 피하느라 다리를 크게 벌려 귀퉁이로 갔다. 힘들게 거울을 보며 모자를 고쳐 썼다. 큰 거울에 비치는 얼룩이 며칠 전 친구 전화처럼 신경 쓰였다. 다시 집으로 올라가 물휴지를 가져올까 하다 일단 걷기 먼저 하자 했다. 이른 출근을 하는 자동차 사이를 피해 둘레길로 들어섰다. 아침 6시 30분인데 벌써 뜨거운 열기가 바닥을 덮었다. 나는 후끈한 공기 속으로 오른발을 들어 힘차게 디뎠다. 걸음을 시작하자마자 빼꼼하게 눈만 드러낸 얼굴로 빗물이 쏟아졌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야 할 비가 내 얼굴에만 내리다니. 오늘 기온은 몇 도까지 오르려나. 이런 날. 걷기를 하다 시원하게 솟아오르는 물줄기 속으로 같이 뛰어들던 친구 전화가 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모두에게 후한 아는 사람. 그 아는 사람을 올해는 좀 솎아 내야겠어. 그럼, 누구를 남겨 두냐고? 그야 친구지. 어떤 사람이 친구냐고?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해 주는 사람. 함께 침묵하고 있어도 마음 편한 사람.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이지.
정채봉 『내 마음의 고삐』 중에서
나와 가까운 곳에 더위와 추위 정도는 거뜬하게 견디게 해주는 친구들이 있었다. 우리 셋은 서로에게 닥친 일상을 수다로 풀어내는 시간을 갖곤 했다. 각자 별일이 없는 날을 고르고 골랐다. 둘 다 자영업자라 주로 그들 일이 끝나는 시간에 맞췄다. 재작년 11월. 아직 12월도 아닌데 무슨 선약이 그렇게 많냐고 서로에게 구시렁대며 겨우 날을 잡았다. 퇴직자인 내가 며칠 후 가게를 정리한다는 친구를 위해 파티 준비를 하겠다며 손을 들었다. 정해진 시간에 마음만 들고 집으로 오라고 했다.
손끝이 굼벵이처럼 느리고 맛 세계로 인도하지 못할 내가 선택한 것은 주로 냉동식품이었다. 나에게는 믿고 돌리는 전자레인지가 있어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깐. 그래도 오이, 파프리카, 당근은 새초롬하게 썰었다. 저녁을 위해 점심시간부터 바빴다. 식탁 위에 그림을 그리며 접시를 이리저리 옮기는데 문자가 왔다. ‘앗! 미안. 오늘 약속을 잊었어.’ 벼르고 별렀던 저녁 자리를 잊었다는 계속 현역으로 있을 친구. 가게를 정리하고 은퇴자가 될 친구를 위한 자리였는데. 그 문자를 시작으로 현역 친구가 약속을 한두 번 건너뛰었다. 속상한 나도 점점 연락하지 않았다. 가게를 정리한 친구는 둘 사이에서 눈치만 봤다. 한번 무너지기 시작한 관계는 바닷가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서로에 대한 신뢰나 우정 따위는 갈매기가 삼켜버렸다. 그랬는데 며칠 전 일요일. 그렇게 연락이 뜸해졌던 여전히 현장에서 뛰고 있는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점심이나 먹을래'라고.
이것저것 무조건 사 들고 와 접시를 이리저리 옮기던 시간이 떠올랐다. 그날 일에 대한 어떤 변명도 사과도 듣지 못했는데. 무턱대고 밥을 먹자니. 체할 것 같았다. 넉넉한 척 펴 보이던 내 가슴속에 숨겨둔 속상함이 고개를 쳐들었다. 경운기만 겨우 지나가는 농로처럼 비좁은 내 마음이 '다음에'라고 답해버렸다.
땀이 튄 안경렌즈가 뿌예졌다. 엘리베이터 얼룩과 내 마음. 그리고 안경이 만나 뜨거운 열기가 되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안개 낀 날처럼 눈앞이 흐릿해졌다. 빠른 걸음과 얼굴을 감싼 마스크가 호흡을 가쁘게 만들었다. 둘레길 옆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소리가 점점 멀어지더니 다리가 휘청거렸다. 나는 쉼터로 마련된 긴 의자에 주저앉았다. 페이스마스크와 모자를 벗었다.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타는듯한 목구멍을 달래려 물 한 모금을 넘겼다. 숨을 정리하는데 마라톤 동호회 사람들이 후끈한 물을 뿌리며 뛰어갔다. 내가 남겨둔 도로 위를 싱싱하게 팔딱거리는 그들의 뒤통수에 내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나는 흘러내린 침을 닦으며 너른 보폭으로 달리는 그들처럼 비좁아터진 내 마음도 널찍하게 펴지길 바랐다.
그들 뒤를 따라가고 싶던 마음과 달리 발걸음은 나를 집으로 이끌었다. 엘리베이터 바닥은 여전했다. 나는 물휴지를 챙겨 다시 엘리베이터로 갔다. 허리를 굽히려는데 뻐근했다. 부지런한 손 대신 휘청거렸던 다리를 들어 발바닥으로 휴지를 밀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몇 번을 닦았더니 깨끗해졌다. 내 마음에 남은 앙금도 이렇게 지워진다면. 마라톤 동호회 사람들처럼 날랜 걸음으로 친구에게 갈 텐데. 씁쓸하게도 머리가 시키는 일을 뜨거운 가슴이 거부했다. 나는 바닥을 닦아낸 휴지 뭉텅이를 손에 든 채 거울 속 나에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이고! 인간아 언제쯤 어른이 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