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 풀이 나를 간지럽혔다
두툼한 내 뱃살에 로봇 손가락을 집어넣은 교수님 일정이 꼬였다는 전화를 받았다. 병원이라는 말에 전화받는 내 손과 목소리가 떨렸다. 나와 다르게 차분한 목소리의 직원이 말했다. 교수님 학회 일정이 겹쳐 예약된 내 검진 일을 미뤄야 한다고. 수술하고 마지막 진료를 받은 지난해 10월 말 이후 병원을 잊고 평범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벌써 정기 검진 일이 다가오다니. 라디오에서는 벌렁거리는 심장과 상관없이 부드러운 피아노 곡이 무심하게 흘러나왔다.
해가 너무 지글거려 구름에 갇힌 낮달이 감히 얼굴을 내밀지도 못하던 날. 머리카락에서 출발한 땀방울이 관리실 기사님 두 분 작업복 깃으로 스며들었다. 내가 내민 생수로 목을 축이며 고장 난 우리 집 주방용 디지털 TV 폰 불량을 찾는다고 애를 썼다. 몇 번의 무전을 주고받다 드디어 원인을 찾았다. 우리 집으로 들어오던 공용 회선 접촉 불량이었다. 그들은 살갗을 태울 것 같은 햇빛을 외면하며 덜렁거리는 회선을 용접해 줬다. 덕분에 건강해진 라디오 음악이 생각지도 않은 병원 전화로 덜컹대는 마음을 달래주며 평화롭게 집안을 적셨다. 나는 전화를 끊고 9월 달력에 적힌 일정을 흩어봤다.
원래 검진일인 9월 초. 진료를 마치면(결과는 괜찮을 거라고 이미 마법을 걸어 뒀다.) 딸 부부와 1주년 파티를 하기로 했었다. 내가 신장 종양을 떼낼 때 사위는 한 몸 같던 담배를 떼어냈다. 그런 이유로 셋이서 칭찬과 위안을 나누려 했던 거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진료일 변경으로 엉켜버렸다. 탁상 달력에 빼곡하게 적힌 9월 일정을 혼자서 이쪽저쪽으로 옮기다 말았다. 숫자만 들여다보면 앞뒤 머리가 후끈거리는 몹쓸 병이 슬슬 시동을 걸며 날뛸 준비를 시작해서다. 나는 달력을 덮으며 문득 사위와 처음 만났던 그해 9월이 떠올랐다.
사람을 생긴 그대로 사랑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세상이 있는 그대로 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이제야 조금은 알겠다. 평화는 상대방이 내 뜻대로 되길 바라는 마음을 그만둘 때이며 행복은 그러한 마음이 위로받을 때이며 기쁨은 비워진 두 마음이 부딪힐 때이다.
황대권 『야생초 편지』 중에서
대학 입학과 동시에 타향살이를 시작한 딸이 꽁꽁 숨겨온 10년 된 남자친구를 내게 소개하겠다던 그날. 나 몰래 딸로부터 도움 요청을 받은 여동생 둘과 약속 장소로 갔다. 그곳으로 가는 동안 내 눈에는 10년이라는 숫자만 어른거렸다. 대학 2학년초부터 만났다는데. 그 긴 시간 딸 곁에 남자친구가 있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내가 한심했다. 그래서 더욱더 그놈이 궁금했다. 어떤 이유로 딸은 지금껏 시치미를 뗐을까? 예약된 방에 들어서니 둘은 사이좋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녀석의 손부터 잡아 일으켰다. 그 녀석 소매 사이로 선명한 타투가 보였다. 놀라서 뒤로 물러서려는 내 발을 붙잡으려 손에 힘을 줘 녀석을 꽉 잡았다.
딸이 남자친구를 내게 숨겨왔던 이유였을까? 녀석은 특성화고등학교 학생부에 소속된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 중 하나'라며 강조했던 타투와 함께였다. 귓바퀴엔 구멍도 보였다. 그 모습에 북소리가 들리는 마음을 숨기며 나는 녀석 앞을 떠나지 않았다. 10년 동안 딸의 모든 순간을 함께해 준 녀석에게 '고맙다'라며 잡은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리고 두 팔 벌려 안았다. 딸은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울었다. 자신의 사랑이 외면당할까 봐 깊은 걱정을 했나 보다. 짠한 마음에 동생 둘도 울었다. 나는 그들 틈에서 '첫 만남에 왜 그래!'라며 진수성찬이 차려진 밥상을 받았다.
그때 세탁소 한 귀퉁이에 있는 재봉틀처럼 덜덜거리던 녀석은 그놈에서 하나뿐인 내 사위가 되었다. 내가 작년 7월 건강검진에서 신장암 진단을 받자, 그토록 애정하던 담배를 끊었다. 두려움에 떨던 나와 딸의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 노랗게 보이던 그 시간을 파랗게 바꿔주려 애썼다. 그런 녀석이 고맙고 예뻐 나는 만나기만 하면 일단 두 팔을 벌린다. 이런 내 모습에 벌게진 얼굴로 안절부절. 나는 쑥스러워하는 그 모습이 재미있어 엉덩이를 뒤로 빼는 녀석을 냅다 붙잡아 첫 만남 때처럼 안아버린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한다는 말을 포옹 속에 담아서. 딸과 사위는 여전히 토끼풀로 만든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주거나 강아지풀로 서로를 간지럽히며 살고 있다. 그런 그들 덕분에 내 세상도 싱싱한 푸른빛으로 물들여졌다. 상다리가 휘청거리던 식당 방에서 만났던 그해 9월부터 지금까지 쭉.
무심하고 부드럽게 흐르던 피아노곡이 끝났다. 아나운서가 다음 곡을 소개하는데 문자가 왔다. 뜨거운 열기가 펄럭거리는 나라로 맛집 투어 간다는 딸이다. 사진 한 장과 함께다. ‘짐꾼이 된 사랑꾼. 내 남자. 앗! 또 자랑했네. 쏘오리 엄마♡♡’ 문자와 사진을 본 순간 내 눈과 입에서 쉬지 않고 꿀이 흘렀다. 그 탓인지 요 며칠째 온 세상이 끈적거린다. 어휴! 이를 어쩌면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