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를 벽에 걸어두는 일
나는 내가 한 일들을 정리하고, 탑처럼 차곡차곡 쌓아 올려 그럴싸한 트로피처럼 잘 만들어야 먹고사는 직업을 가졌다. 글도 그렇고 그림도 그렇다. 흩어진 생각을 모아 하나의 형태로 정리해서 선보여야만 한다.
그런데 나는 그 일을 유난히 못하는 사람이다.
그 이유를 어젯밤, 유독 기억력이 좋은 한 중학생 아이와 대화를 나누다 알게 되었다.
아직 세상을 살아온 지 겨우 십오 년밖에 되지 않은 그 아이는 자신이 겪은 장면과 사건들을 머릿속 파일에 하나씩 넣어 바카라꽂이에 꽂아 둔다고 말했다. 오래된 파일은 조금 바래지만, 필요하면 언제든 스위치를 눌러 꺼내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5년 전 일도, 10년 전 일도 선명하게 떠올려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한참 동안 내 머릿속 기억 장치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파일도 없었다.
바카라꽂이도 없었다.
창고조차 없었다.
내 기억들은 언제나 열정에 휘말려 무언가에 열중하다가 순식간에 일을 해치우고는 작은 먼지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우주 공간처럼 끝도 없는 어둠 속에서 셀 수 없이 많은 기억들이 먼지가 되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것이 나의 기억 창고였다.
그제야 오랫동안 이해되지 않던 퍼즐 하나가 제자리를 찾았다.
내 기억은 원할 때 꺼내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숨을 쉬다 콧속으로 들어온 먼지 때문에 재채기를 하듯 불쑥 떠오르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눈물까지 찔끔한다. 필요할 때는 아무리 애를 써도 생각나지 않다가, 설거지를 하거나 길을 걷다가 느닷없이 떠오르는 이유도 그것이었다.
매일 봤으니 당연히 떠올라야 할 사람 이름도, 어떤 단어 하나가 목 끝까지 올라왔다가 끝내 나오지 않던 순간들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먼지는 정리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아지면 공기를 흐리게 만든다. 숨쉬기도 답답하고 앞도 잘 보이지 않는다. 결국 한 번쯤은 창문을 열어 모두 날려 보내거나, 청소기로 빨아들여 없애는 수밖에 없다.
나 역시 과거의 기억 때문에 눈앞이 흐려지거나 압도되지 않기 위해 가끔씩 기억들을 통째로 날려 버리며 살아왔던 것 같다.
그런 기이한 기억 저장 장치를 달고 살아왔으니, 어릴 적부터 “너는 치매 조심해야 한다. “는 가족들의 말을 자주 들었던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나에게 살아간다는 것은 조금씩 사라지는 일이라는 생각이 내 안에 자리 잡았다.
하루는 잠깐 켜졌다가 잠들면 꺼지는 전구처럼 그렇게 반복되는 사이 어제의 나는 먼지가 되어 어디론가 흩어진다.
그래도 먼지치고는 야망이 참 컸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나는 야망에 비해 천성적으로 게으른 사람이다. 반짝이는 쓰레기에도 쉽게 정신을 빼앗기고, 값싼 도파민에 가장 귀한 집중력과 시간을 헐값에 넘겨주곤 한다. 그렇게 또 오늘의 내가 조금 사라진다.
그럼에도 내게는 영원한 장래희망이 하나 있다.
내 그림으로 먹고사는 것.
그리고 자연의 순환처럼 그림으로 돈을 벌면 다시 물감을 사고, 또 그림을 그리는 것.
사라지는 오늘의 나를 그림으로 붙잡아 내일에게 힘껏 던져주고, 그 빛을 생의 마지막까지 이어 나가는 것.
어쩌면 그림이란 먼지에 색을 입히는 작업인지도 모른다. 사라질 현재를 이어 붙여 하나의 의미를 만들고, 그것을 캔버스에 남기는 일.
나는 그 먼지들을 세상 곳곳의 가장 비싼 벽에 아이의 낙서처럼 붙여 놓고 싶다.
“나 여기 살았노라.”
가능하다면 Elon Musk의 로켓이라도 빌려 우주 끝까지 날려 보내고 싶다.
오늘의 나는 또 사라진다.
하지만 사라지는 먼지에도, 아주 잠깐은 사랑스러운 색이 스며들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