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벽을 마주 보고
현실에 빈 공간이 있으면 꼭 무엇으로든 채워지는 것 같다.
나에게는 특히 빈 벽이 그렇다.
얼마 전 벽에 기대어하는 스트레칭 영상을 보았다.
나도 따라 해볼까 싶어 집 안을 둘러보다가 조금 당황했다.
스트레칭할 빈 벽이 없었다.
처음 이 널따란 곳으로 이사 왔을 때만 해도 소파도, TV도, 커튼도 없이 몇 달을 살았다.
텅 빈 거실을 보면서도 허전하기보다 시원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런데 언제 이렇게 된 걸까.
벽에는 그림이 걸리고, 가구가 들어오고, 옮기기도 어려운 커다란 소파까지. 여기저기 물건들이 자리를 잡았다.
이젠 빈 벽을 찾기 어려울 만큼.
빈 공간은 그렇게 채워지는 모양이다.
살다 보면 하나가 들어오고, 또 하나가 머물고, 어느 날 문득 돌아보면 빈자리였다는 사실조차 잊게 된다.
그러다 문득 마음속 빈 공간도 그럴까 생각했다.
이사와 함께 몇몇 시절 인연이 자연스레 저물었다.
한바탕 인간관계가 정리되고 나니, 마음 한켠에도 제법 널찍한 빈 공간이 생겼다.
처음엔 미안하지만 섭섭함보다 시원한 개방감이 더 컸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문득 그 자리가 허전하다고 느꼈다. 심심하고 공허한 마음이 점점 더 커졌다.
무언가 얼른 걸어두어야 할 것 같고, 누군가를 데려와 앉혀두어야 할 것 같았다.
비어 있는 건 무언가 잘못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집의 빈 벽을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놓인다.
이곳도 언젠가는 채워질 것이다.
새로운 사람이 들어올 수도 있고, 오래 붙들고 싶은 일이 생길 수도 있고, 생각지도 못한 열정이 덜컥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다.
어쩌면 잠깐 빛나다 지나가는 아름다움일지도 모른다.
무엇이 올지는 아직 모르겠다.
다만, 조급함을 버리고 굳이 서둘러 채우지 않기로 했다.
대신 잘 쓸고 닦기로 했다.
오래된 마음의 흰 벽을 애정 어린 눈으로 자주 바라보는 것…
마음의 빈 공간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도록.
언젠가 찾아올 세입자든,
새로운 열정이든,
잠시 머물다 가는 아름다움이든,
들어와 머물기 좋은 자리가 되도록.
나는 요즘
마음의 빈 칸을 빛나게 닦아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