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모드로 전환한 밴쿠버,
레인쿠버의 도래다.
“여름 한 철 맘껏 화창했잖아. 한두 해 겪는 일도 아니지? 견뎌.”
으름장을 놓을 것 같은 찬 비가 내린다.
방수 외투를 입고, 루이에게도 입히고
커플룩을 완성한 뒤
강제 백허그를 한 채 바깥 큰 나무 아래 내려놓는다.
하루 네 번.
루이도 나도 비 오는 날은 수고롭다.
그런데 ‘매일 비’에서 ‘흐리거나 맑음’으로
2주간의 예보가 바뀌었다.
가을과 겨울의 지루한 우기를 견뎌야 하는
밴쿠버 생활에서
비 그침 표시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갠다.
바빴던 여름 일 스케줄도 줄였다.
한국행을 앞두고 무리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조금 더 빈둥거리고 싶은 게으름이 만든 합작품이다.
모처럼 맞은 3일 연휴.
한껏 뒹굴거리며 주말을 보냈다.
그런데 일을 쉴 때면 긴장이 풀린 탓인지
몸은 오히려 더 찌뿌둥하다.
환절기 감기를 달고 지내는 편이라
머잖아 떠날 한국행을 생각하면
사뭇 신경이 곤두선다.
뜨거운 티를 내려 마시고
이불속에서 만화바카라을 뒤적인다.
그러다 ‘5분 안에 깊은 잠으로 이끌어준다’는 영상을 튼다.
역사와 한 시대를 이끈 인물의 서사가
화면 위로 좌르륵 펼쳐진다.
낮잠과 불면의 밤,
수면을 돕는 용도로 듣는 건
조금 미안한 일이다.
까무룩 잠들었다가
짧은 잠에서 깨어나니 어느새 오후다.
그리고 또 루이와 두 번째 산바카라을 나선다.
루이는 여전히 느리다.
앞서가는 나를 따라오지도 않고
그렇다고 돌아가자는 눈치도 아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게으름에 빠진 나를 바깥으로 끌어내는
최소한의 방지턱 같은 존재다.
짧은 산바카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다.
별것 하지 않은 하루다.
일도 쉬고, 약속도 없고,
바카라 몇 장 읽다 졸고, 낮잠을 자고,
비를 맞으며 루이와 걸었다.
한국행을 앞두고 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떠올리면서도
오늘은 조금 미뤄둔다.
창밖으로 다시 비가 떨어진다.
여름은 충분히 누렸고,
이번에는 느린 계절을 느리게 살아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