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만이야
기상나팔은 따로 없어도
우리 집 어르신의 기침소리는
그 역할을 충분히 대신한다.
웤, 웤!
쌀쌀한 공기를 가르며 첫 산바카라을 다녀오면
배고픈 자식들이 엄마가 차릴 밥상을 기다리듯
일상의 루틴이 대기 중이다.
모나미 0.5mm 펜으로 《무진기행》을 필사하며
역시 ‘선수는 장비빨’이라는 거창한 표현을 빌려
잠시 웃었더랬다.
악필인 내 글씨체가 제법 단정하게 보이는 건
고마운 펜의 마법이었구나 싶어
다시 사려고 찾아봤지만 어디에도 재고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대안으로
이곳 문구점에서 ‘0.7mm Super Smooth’라고 적힌
필기용품을 속는 셈 치고 하나 장만했다.
웬걸, 정말 매끄럽게 잘 써진다.
그렇게 필사를 이어가다 보니
두툼한 노트 한 권이 거의 채워져 간다.
한 시간가량의 필사를 끝내면
다음 자녀 밥 챙기듯 언어 앱이
공부를 시작하라고 성화다.
‘광고 방해 없이 무한 학습에 도전하지 않겠니?’
집요한 유혹도 요리조리 피해
오늘의 목표량을 초과 달성한다.
밤사이 하수 중의 으뜸 자리를 공략당했지만
괜찮다.
‘공부는 승부가 아니라 꾸준히 하는 거지.’
AI와 간단한 중국어 대화를 나누고
스페인어까지 몇 마디 주고받다 보면
마음은 어느새 멀티 외국어 가능자,
착각의 나래도 잠시 펼쳐본다.
내 나라는 지금 큰 명절연휴겠구나.
엄마도, 동생들도
저마다 다른 하늘 아래서 살아간다.
이역만리 먼 땅에서지만
가족을 향한 그리운 마음만
가을바람에 실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