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사다리를 내려놓고 다시 태어나다

3장 「종교지도자에게 거듭남을 요구하시다」를 읽으며

by신아르케

니고데모는 부족한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그랬다. 그는 바리새인이었고, 유대인의 지도자였으며, 성경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었다. 율법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지키는 일에도 누구보다 열심이었을 것이다. 오늘날로 비유하면 성경 지식도 많고, 교회생활도 오래 했으며,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종교 지도자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런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는 예수님의 표적을 보았다. 그리고 예수님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는 예수님을 적대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은 아니었다. 상당한 관심과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종교적 경력을 칭찬하지 않으셨다. 그의 성경 지식을 인정해 주지도 않으셨다. 오히려 그의 삶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는 말씀을 하셨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장 3절


이 말씀은 니고데모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을까.


니고데모는 평생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 노력해 온 사람이었다. 율법을 공부했고, 종교적 규칙을 지켰고, 다른 사람을 가르쳤다. 자신이 적어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몇 가지를 더 보충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기도를 조금 더 해라.”


“율법을 조금 더 잘 지켜라.”


“선행을 조금 더 많이 해라.”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장을 읽으며 사다리를 떠올렸다.


니고데모는 평생 하나님께 올라가기 위한 사다리를 만들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율법이라는 한 칸을 올라가고, 기도라는 한 칸을 올라가고, 금식이라는 한 칸을 올라가고, 선행이라는 한 칸을 올라간다. 그리고 종교 지도자라는 높은 위치까지 올라왔다.


그는 아마 자신이 꽤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사다리를 몇 칸 더 올라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린다.


“니고데모, 그 사다리로는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


이것이 니고데모에게는 견디기 힘든 말이었을 것이다.


그의 몇 가지 잘못만 지적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평생 옳다고 믿으며 살아온 구원의 방식 자체가 흔들린 것이다.


니고데모와 같은 바리새적 신앙이 가진 가장 큰 위험 가운데 하나는 자기 의였다.


자기 의란 자신이 행한 좋은 일을 근거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려는 마음이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나는 율법을 잘 지켰습니다.”


“나는 이렇게 많은 종교적 일을 했습니다.”


사람과 비교하면 얼마든지 우월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우리는 종종 시험을 치른 뒤 자기 시험지를 자기가 채점한다.


다른 사람보다 점수가 높다는 이유로 스스로 합격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종 판정자는 내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성적표를 제출해 구원을 요구할 수 없다.


그래서 복음은 인간의 자존심을 불편하게 만든다.


복음은 먼저 말한다.


너는 너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이 원리는 달라지지 않는다.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도 자신의 선행을 쌓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로 여기셨다고 말한다.


하박국 역시 말한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구원은 인간이 하나님께 제출하는 월급 청구서가 아니다.


선물에 가깝다.


월급은 내가 일했기 때문에 받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선물은 다르다.


선물을 받는 사람은 값을 지불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그 값을 지불한다.


복음에서는 그 값을 그리스도께서 지불하셨다.


그래서 이신칭의라는 말도 중요하다.


이신칭의는 인간이 자신의 행위나 공로 때문에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을까.


맥아더는 이 말씀을 구약의 에스겔 36장과 연결하여 이해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에게 깨끗한 물을 뿌려 정결하게 하시고, 새 마음을 주며, 새 영을 그들 속에 두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래서 거듭남은 단순히 나쁜 습관 몇 가지를 고치는 일이 아니다.


벽지가 오래되었다고 새 벽지를 붙이는 정도의 변화가 아니다.


집의 기초부터 다시 손보는 것에 가깝다.


기독교가 말하는 중생은 인간이 스스로를 조금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자기계발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사건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회개조차 내가 하나님께 구원의 대가로 제출하는 업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충분히 통렬하게 회개했으니 이제 나를 구원해 주십시오.”


이런 구조가 아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완고한 마음을 깨우시고, 죄를 죄로 보게 하시며, 자기 의를 붙들고 있던 손을 놓게 하실 때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께 돌아서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회개는 구원의 값을 지불하는 행위가 아니다.


새 생명이 시작되었다는 방향의 변화다.


나는 회개를 자동차의 방향 전환과 비슷하게 생각한다.


서울로 가야 하는 사람이 부산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고 하자.


그 운전자가 아무리 성실하게 운전해도 목적지에는 도착할 수 없다.


제한속도를 잘 지켰고 차선 변경도 완벽했다는 사실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잘못된 것은 운전 기술이 아니라 방향이기 때문이다.


그때 필요한 것은 더 열심히 달리는 것이 아니다.


차를 돌리는 것이다.


니고데모에게 필요했던 것도 이것이었다.


그는 더 열심히 종교생활을 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의로 하나님께 올라가려고 했던 방향에서 돌아서야 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광야의 놋뱀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다 불뱀에 물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게 하셨다.


뱀에 물린 사람이 그것을 바라보면 살았다.


놋뱀에 어떤 마법적인 힘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방법을 믿고 바라본 것이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자신의 십자가와 연결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광야에서 죽어가던 사람들이 장대 위의 놋뱀을 바라보았듯이 죄인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여기에서 인간의 자랑은 사라진다.


죽어가는 사람이 치료제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구원의 방법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셨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이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선행도, 지식도, 종교생활도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다.


하지만 맥아더는 여기서 한 가지를 더 강조한다.


믿음은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니고데모도 이미 예수님에 관한 여러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예수님의 기적을 인정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이라는 것도 인정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하지 않으셨다.


누군가 의사에게 말한다고 생각해 보자.


“선생님은 정말 훌륭한 의사입니다.”


“선생님이 주신 약이 효과가 있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정작 그는 약을 먹지 않는다.


그렇다면 의사에 대한 그의 지식은 자신을 치료하지 못한다.


믿음은 단순히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 몇 가지를 머릿속에서 옳다고 인정하는 것 이상이다.


죄 가운데 죽어가는 내가 그리스도 외에는 나를 살릴 분이 없음을 인정하고 그분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믿음에는 회개가 따라온다.


그 회개는 완벽한 삶을 의미하지 않는다.


거듭난 사람도 넘어질 수 있고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러나 삶의 방향이 달라진다.


죄를 집으로 여기며 편안하게 머무르지 않는다.


넘어졌을 때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려고 한다.


어둠 속에 숨기보다 빛으로 나오려고 한다.


요한복음 3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은 빛과 어둠을 말씀하신다.


빛이 왔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가 드러날까 두려워 빛보다 어둠을 사랑한다.


나는 이 말씀을 읽으며 어두운 방을 떠올린다.


방 안에 먼지와 쓰레기가 가득해도 불을 끄면 보이지 않는다.


그 상태에서는 편안할 수 있다.


하지만 빛을 켜는 순간 모든 것이 드러난다.


먼지도 보이고, 얼룩도 보이고, 치워야 할 것들도 보인다.


그때 두 가지 선택이 가능하다.


다시 불을 끄거나,


불편하더라도 빛 아래에서 방을 청소하기 시작하거나.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믿음도 이와 비슷한 면이 있다.


빛 앞으로 나오는 것이다.


자신의 죄와 자기 의가 드러나는 것을 감수하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조차 하나님의 은혜다.


나는 이 장을 읽으면서 에스겔의 마른 뼈 골짜기가 떠올랐다.


골짜기에는 뼈들이 가득했다.


그것도 심히 말라 있었다.


마른 뼈는 스스로 살아날 수 없다.


“조금만 더 노력해라.”


“조금만 더 힘을 내라.”


라고 말한다고 살아나지 않는다.


생명이 밖에서 와야 한다.


하나님의 영이 불어와야 한다.


비록 에스겔의 환상은 본래 포로 상태의 이스라엘 회복을 말하는 장면이지만, 영적으로 죽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신다는 복음의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


니고데모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부족했던 것은 종교가 아니었다.


오히려 종교는 넘치도록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 부족했던 것은 생명이었다.


예수님은 그의 종교적 사다리를 조금 더 높여 주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 사다리에서 내려오라고 하셨다.


자신의 율법 준수도,


자신의 성경 지식도,


자신의 슬롯적 지위도,


자신의 종교적 자부심도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생명을 받으라고 하셨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니고데모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 역시 나만의 사다리를 만들며 살아갈 수 있다.


성경을 많이 읽었다는 것,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다는 것,


기도를 열심히 했다는 것,


다른 사람보다 도덕적으로 잘 살았다는 것,


신학을 많이 안다는 것까지도 어느 순간 내 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는 그런 사다리가 모두 무너진다.


내가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내려오셨다.


내가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살리신다.


내가 나의 의를 만들어 하나님께 제출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한다.


그래서 복음은 한편으로 나를 완전히 낮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를 완전히 자유롭게 한다.


내가 나를 구원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종교적 성적표를 들고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합격 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없다.


나의 소망은 내 성적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조금 더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명이 시작되면 믿음이 생기고, 회개가 시작되고, 삶의 방향이 달라지며, 조금씩 열매가 나타난다.


그 열매가 나를 살리는 것은 아니다.


살아났기 때문에 열매가 맺히는 것이다.


니고데모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종교가 아니었다.


나에게 필요한 것도 마찬가지다.


더 높은 사다리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이다.


그리고 그 생명은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다.


그래서 오늘 나는 내 손에 들고 있는 사다리를 내려놓으며 다시 묻게 된다.


나는 지금 나의 의를 붙들고 있는가.


아니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는가.


그리고 조용히 고백한다.


주님, 제가 더 높이 올라가려고 애쓰기보다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으로 다시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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