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없는 복음』 2장을 읽으며
“예수님을 믿습니다.”
기독교인에게 이보다 익숙한 고백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존 맥아더의 『주님 없는 복음』 2장을 읽으며 나는 이 익숙한 고백 앞에서 다시 질문하게 되었다.
나는 정말 예수님을 믿는가?
조금 더 정확하게 묻는다면 이렇다.
내가 입으로 고백하는 믿음은 내 삶에서도 사실인가?
맥아더가 문제 삼는 것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복음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인간의 행위나 공로로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성경은 말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에베소서 2장 8절
이것이 이신칭의의 핵심이다.
죄인이 자신의 선행과 공로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다가 어느 순간 믿음이 단순한 입술의 고백으로 축소될 수 있다.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여기까지는 받아들이면서도,
“이제부터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십니다.”
라는 고백은 별개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는 것과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것을 나누기 시작한다. 구원은 먼저 받고, 제자도의 삶은 나중에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맥아더는 그 둘을 그렇게 쉽게 분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나를 죄에서 건져 주시는 구원자이면서 동시에 나의 삶을 다스리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단순히 어떤 교리를 인정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가복음 9장 23절
이 말씀은 결코 가볍지 않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내 존재를 무가치하게 여기라는 뜻이 아니다. 내 삶의 최종 결정권이 나에게 있다는 생각을 내려놓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
내가 편한 것,
내 욕망과 자존심과 계획을 언제나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놓는 삶에서 돌아서는 것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도 단순히 어려운 일을 참고 견디라는 정도의 말이 아니다.
당시의 십자가는 죽음의 상징이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필요하다면 나의 편안함과 자존심과 이익을 내려놓고서라도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고백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나는 가족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가족을 위해 아무런 희생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가족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경제적인 바카라임도 회피하고, 집안의 어려운 일도 외면하고, 나의 편안함만을 추구한다면 그 사랑이라는 말은 점점 힘을 잃는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입에서 나오지만 삶이 그 말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나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을 떠올리게 된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의미를 삶의 실제 사용과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았다. 말은 삶의 맥락 안에서 의미를 가진다.
한 사람이 내게 말한다고 생각해 보자.
“나는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이 정말 좋아.”
그런데 그는 계속 시계를 본다.
몸은 이미 문 쪽을 향하고 있다.
내 말에는 관심이 없다.
가능한 한 빨리 이 자리를 떠나고 싶어 하는 모습이다.
그의 입에서 나온 문장의 뜻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말의 진실성은 의심하게 된다.
반대로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우리의 삶은 자연스럽게 그 사랑의 방향으로 움직인다.
보고 싶어진다.
함께 있고 싶어진다.
시간을 내게 된다.
전화를 하고 메시지를 보낸다.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생각한다.
기쁘게 해주고 싶어진다.
때로는 내 시간과 돈과 편안함을 기꺼이 포기한다.
“사랑한다”는 한 문장이 삶 전체로 번져 나가는 것이다.
신앙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주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이 고백이 진실하다면,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내 삶의 어느 곳에서는 그 고백의 흔적이 나타나야 한다.
성경은 그것을 열매라고 부른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서 23절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순서를 뒤집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열매를 맺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구원받았기에 열매가 맺히기 시작한다.
사과나무가 사과를 매달아 놓아서 사과나무가 되는 것이 아니다. 살아 있는 사과나무이기 때문에 때가 되면 사과가 열린다.
마찬가지로 선한 행동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믿음이라면 그 생명의 흔적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바울이 말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에베소서 2장도 8절과 9절에서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으며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선언한 직후, 10절에서는 우리가 선한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말한다.
구원의 원인은 선한 행위가 아니다.
그러나 구원은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도 않는다.
회개 역시 그렇다.
회개는 단순히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회개는 방향을 돌리는 것이다.
죄를 죄라고 인정하고 그 죄와 계속 화해하며 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알코올 중독에 빠져 있다면 오늘 회개했다고 내일부터 아무 유혹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넘어질 수도 있다.
실패할 수도 있다.
또다시 죄에 끌릴 수도 있다.
그러나 달라지는 것이 하나 있다.
이제는 죄를 집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 죄를 정당화하며 편안하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싸우기 시작한다.
필요하다면 도움을 요청하고, 환경을 바꾸고, 절제하고, 다시 일어선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죄와 싸우기 시작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지점에서 나는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한다.
자칫 이런 이야기는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는 이야기로 흐를 수 있다.
“결단하라.”
“행동하라.”
“변화하라.”
물론 우리의 의지와 결단은 필요하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앙은 그보다 더 깊은 곳을 바라본다.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믿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다.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믿음조차 선물이다.
그렇다면 성화는 어떠한가.
성화 역시 결국 은혜다.
바울은 말한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립보서 2장 13절
우리가 순종하려고 애쓰지만 그 순종하고 싶은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도 하나님이 일하신다.
우리 안에는 여전히 죄의 본성이 남아 있다.
내 마음의 보좌에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다시 앉으려고 한다.
내 욕망이 왕이 되고,
내 자존심이 왕이 되고,
내 돈과 성공과 편안함이 다시 주인이 되려고 한다.
그래서 성화의 길에는 긴장이 있다.
우리는 넘어지고 또 넘어질 것이다.
어제 주님께 맡겼던 것을 오늘 다시 붙잡고, 어제 내려놓았던 욕망을 오늘 다시 꺼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의 소망은 우리의 완벽한 의지에 있지 않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립보서 1장 6절
시작하신 분도 하나님이고, 이루어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다.
그래서 나는 『주님 없는 복음』 2장을 읽으며 한 가지 역설 앞에 서게 된다.
주님은 나에게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신다.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신다.
회개하라고 말씀하신다.
순종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나는 그 명령 앞에서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다.
내 힘만으로는 나 자신을 끝까지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안의 죄는 끊임없이 왕좌로 돌아오려고 한다.
그러므로 어쩌면 성화란 매일 아침 마음의 왕좌에서 나를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다시 그리스도를 모시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마저 은혜다.
결국 문제는 단순하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몇 번 말했느냐가 아니다.
내가 완벽한 삶을 살고 있느냐도 아니다.
질문은 이것이다.
내 삶은 지금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넘어지더라도 다시 주님께 돌아가는가.
죄를 사랑하며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싸우고 있는가.
내 생각과 시간과 돈과 관계와 선택의 방향이 아주 조금씩이라도 그리스도를 향해 움직이고 있는가.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마태복음 7장 21절
무서운 말씀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를 정직하게 만드는 말씀이다.
입술의 고백은 중요하다.
그러나 고백은 결국 삶이라는 문장 속에서 읽힌다.
나는 열매를 맺어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구원받았기에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열매조차 나의 자랑이 될 수 없다.
믿음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고,
회개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며,
넘어진 나를 다시 일으켜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고백한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주님에 관해 어떤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나를 구원하신 구원자이시며 동시에 내 삶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백이 오늘 나의 삶 속에서 조금씩 실제가 되어 가기를 바란다.
십자가를 지는 것도,
자기를 부인하는 것도,
회개하는 것도,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는 것도,
결국은 모두 은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