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없이 받은 구원은 왜 값싼 구원이 될 수 없는가?

《주님 없는 복음》 서문을 읽으며-칭의, 주재권, 그리고 성화의 방향성

by신아르케

존 맥아더 목사님의 《주님 없는 복음》을 읽기 시작했다.

존 맥아더라는 이름은 복음주의 교회 안에서 매우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미국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에서 오랫동안 목회했고, 탈봇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며, 이후 마스터스 대학교와 마스터스 신학교를 이끌면서 수많은 목회자와 신학생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공식적인 호칭은 아니지만 그를 두고 ‘목회자들의 목회자’, 혹은 목회자들의 스승과 같은 인물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크게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맥아더에게도 분명한 신학적 입장이 있었다. 그는 아무런 신학적 색채도 가지지 않은 중립적인 목회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평생 목회에서 중요하게 여긴 한 가지 원칙은 매우 분명했다.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생각에 성경을 맞추기보다, 성경 본문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끝까지 살펴보려 했다는 것이다.

성경을 한 절 한 절 읽으며 문맥을 살피고, 자신의 생각이나 당시 유행하는 신학적 분위기보다 성경 자체의 메시지를 발견하려는 그의 강해 설교 방식은 잘 알려져 있다. 자신이 속한 신학적 전통과 긴장이 생길 수 있는 문제라 하더라도 결국 질문은 하나였다.

성경은 실제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러한 그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것이 마태복음 강해였다.

맥아더는 1978년부터 마태복음을 한 절씩 설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 7년 반 동안 226편에 이르는 설교를 이어갔다. 한 권의 복음서를 그렇게 오랜 시간 반복해서 읽고 연구하고 가르치면서 그에게 점점 더 크게 다가온 질문이 있었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전하신 복음은 무엇인가.

그리고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오랜 질문과 연구의 결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주님 없는 복음》이다.

바카라의 서문을 읽으면서 나는 이 바카라이 단순히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카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확인하게 되었다. 오히려 맥아더가 문제를 제기하는 출발점에는 매우 중요한 복음의 진리가 있다.

인간은 자신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반드시 이해해야 하는 교리가 바로 이신칭의다.

이신칭의라는 말은 어렵게 들리지만 뜻은 분명하다. 인간이 자신의 착한 행동이나 종교적인 노력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뜻이다.

나는 죄인이다.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완전한 의를 만들어낼 수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담당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를 근거로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칭의는 바로 이 하나님의 선언이다.

내가 실제로 죄를 한 번도 짓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못 본 척하시는 것도 아니다. 나의 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담당되었고, 나의 구원의 근거가 더 이상 나에게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값없이 주어진다.

내가 그 값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가 붙잡아 온 가장 중요한 복음의 중심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맥아더는 바로 이 지점에서 현대 교회의 한 가지 위험을 발견한다.

너무 귀한 이 진리가 잘못 이해될 경우 구원 자체를 너무 가볍게 여기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입으로 고백했다.

결신기도를 했다.

세례를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구원받았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 이후의 삶은 어떠한가.

죄에 대한 태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하나님을 따르고 싶은 마음도 없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생각도 없다. 마음의 중심에는 여전히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앉아 있다. 예수님은 내가 죽은 뒤 천국에 데려다주는 구원자로만 필요할 뿐, 지금의 내 삶을 다스리는 주님으로는 필요하지 않다.

맥아더는 바로 이것을 문제 삼는다.

그는 이러한 복음을 흔히 ‘쉬운 믿음’이라고 비판한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과 예수님을 실제로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완전히 분리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문제 때문에 그 유명한 ‘주재권 구원’ 논쟁이 시작되었다.

주재권이라는 말 역시 어렵게 들리지만 뜻은 단순하다.

내 삶의 주인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다.

나는 예수님을 단지 나를 구원해 주는 분으로만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그분이 내 삶의 주님이라는 사실도 받아들이는가.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그렇다면 내가 예수님의 주재권을 얼마나 잘 인정해야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내 삶의 70퍼센트를 맡기면 되는가.

80퍼센트인가.

90퍼센트인가.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다시 인간의 행위를 구원의 점수표로 만들게 된다.

나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경계라고 생각한다.

맥아더가 말하려는 핵심 역시 우리가 완벽하게 그리스도께 순종해야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다. 참된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 안에 삶의 새로운 방향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완전함이 아니라 방향이다.

이 말이 내 마음에 오래 남았다.

나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 안의 믿음이 항상 같은 온도를 유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어느 날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한다. 말씀 한 구절에도 마음이 움직이고, 기도하는 시간이 기쁘다. 그러나 어느 날에는 하나님이 멀게 느껴진다. 말씀을 읽는 것도 힘들고, 세상의 욕망에 쉽게 흔들린다.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나는 다시 내 삶의 중심으로 돌아온다.

내 계획.

내 욕망.

내 성공.

내 자존심.

내 판단.

그리고 하나님께 묻기보다 내가 이미 결정한 것을 하나님께 승인해 달라고 기도한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창세기에서부터 시작된 인간의 오래된 욕망인지도 모른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인간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속삭였다.

어쩌면 죄의 가장 깊은 뿌리는 단순히 나쁜 행동 몇 가지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이 앉으셔야 할 내 마음의 왕좌에 내가 앉는 것이다.

내가 선과 악의 기준이 되고, 내가 삶의 최종 결정자가 되고, 심지어 하나님조차 나의 행복과 성공을 위한 도구처럼 사용하는 것이다.

인간의 근본적인 교만은 바로 하나님처럼 되려는 마음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성화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내가 마음의 왕좌에서 단 한 번 완벽하게 내려오는 사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평생 그 왕좌에서 내려오는 법을 배워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려왔다가 또 올라간다.

하나님께 맡겼다가 다시 움켜쥔다.

회개했다가 다시 교만해진다.

주님을 따르겠다고 고백했다가 어느 순간 다시 내 뜻대로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또다시 내려온다.

어쩌면 이것이 성화인지도 모른다.

평생 자신의 왕좌에서 내려오는 법을 배우는 것.

그러나 여기에서도 나는 한 가지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것을 내 힘으로 완성할 자신이 없다.

아니, 살아오면서 점점 더 분명하게 깨닫게 된 것은 인간의 내면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이 죄에 물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완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서게 된다.

나의 뜨거운 신앙을 바라보아도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없다.

나의 순종을 바라보아도 그렇다.

나의 성화를 바라보아도 마찬가지다.

좋은 날도 있지만 너무 형편없는 날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붙잡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과 십자가의 공로다.

그렇다고 성화에서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죄와 싸워야 한다.

말씀을 읽어야 한다.

기도해야 한다.

순종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낮아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 의지와 노력조차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은혜와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때로는 내가 선택해서 걸어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나온 삶을 뒤돌아보면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과 사건과 실패와 기다림과 고난이 나를 조금씩 바꾸어 놓았다.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시련이 나의 교만을 꺾기도 했고, 실패가 내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알게 하기도 했다. 누군가의 사랑과 용서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했고, 어느 날 우연히 읽은 말씀 한 구절이 인생의 방향을 다시 돌려놓기도 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우리의 삶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성화를 왈츠에 비유하고 싶다.

왈츠는 두 사람이 함께 춘다.

내 발도 움직여야 한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춤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두 사람이 동시에 자기 마음대로 춤을 이끌 수는 없다.

한 사람이 이끌고 다른 사람은 그 움직임을 느끼며 따라간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어쩌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나는 분명 움직인다.

순종하려 노력한다.

죄와 싸운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나를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때로 나는 박자를 놓친다.

주님의 발을 밟는다.

심지어 내가 춤을 이끌겠다고 고집한다.

그러다가 다시 그분의 손을 붙잡는다.

그리고 조금씩 그분의 리듬을 배워간다.

아마 평생 완벽한 춤을 추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완벽한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손을 잡고 누구에게 이끌리고 있는가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맥아더가 강조하는 ‘방향성’이라는 말은 중요하다.

구원받은 사람이 얼마나 완벽한가를 묻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삶이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넘어져도 다시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죄를 지었을 때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가는가, 아니면 그 죄 때문에 아파하며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가.

자신이 삶의 주인이라고 끝까지 주장하는가, 아니면 수없이 실패하면서도 그리스도께서 참된 주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그분께 삶을 내어드리는 법을 배워가는가.

그 방향의 변화가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칭의와 성화를 서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동시에 둘을 혼동해서도 안 된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구원의 시작이다.

성화는 그렇게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이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점차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평생의 과정이다.

우리는 성화되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성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길은 우리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며, 하나님께서 마침내 이루어 가시는 은혜의 과정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구원은 알면 알수록 더욱 신비롭게 느껴진다.

물론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하여 구원받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언제 부르시고, 어떤 말씀과 어떤 사람과 어떤 사건을 통해 그의 마음을 움직이시며, 어떻게 그의 완고함을 깨뜨리고, 수십 년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닮도록 만들어 가시는지 그 모든 과정을 인간이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우리의 이해 너머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

그래서 구원에 대해 깊이 생각할수록 나는 다른 신자와 나 자신을 비교하는 일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깨닫는다.

맥아더 목사님이든 평범한 이름 없는 성도이든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은혜가 필요한 죄인이다.

누군가 조금 더 성숙해 보이고, 누군가는 아직 많이 부족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의 거룩함을 근거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붙잡아야 할 것은 우리의 성화 성적표가 아니다.

그리스도다.

우리의 강한 의지도 아니다.

끝까지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다.

그래서 나는 《주님 없는 복음》의 서문을 읽으며 한 가지 역설을 생각하게 되었다.

구원은 값없이 주어진다.

그러나 결코 값싼 구원이 아니다.

값없이 주어진 이유는 그 구원의 값이 싸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그 값을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값은 이미 다른 분이 지불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으로 지불하셨다.

그래서 은혜는 공짜이지만 결코 값싸지 않다.

그리고 그 은혜를 참으로 만난 사람은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이전과 같은 방향으로만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도 넘어지고, 다시 내 마음의 왕좌에 올라앉고, 또다시 나 자신에게 실망한다.

그러나 다시 내려온다.

그리고 다시 주님의 손을 잡는다.

구원의 확신은 내가 얼마나 완벽하게 그 춤을 추고 있는가에 있지 않다.

나를 위해 값을 치르신 그리스도와, 연약한 나를 놓지 않고 끝까지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

어쩌면 신앙생활이란 평생 그 사실을 배우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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