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 후 복직하며 깨달은 인생의 공수교대
가르치던 사람이 배우는 자리에 앉고,
구박하던 사람이 도움을 구하는 자리에 앉는다.
야구에는 공수교대라는 명확한 규칙이 존재한다. 공격의 짜릿함이 영원할 것 같아도, 세 번의 아웃카운트가 채워지는 순간 예외 없이 공격은 끝난다. 타자들은 배트를 내려놓고, 글러브를 챙겨 수비로 나간다. 어쩌면 인생도 그렇다. 내가 영원한 공격수일 거라는 오만함은, 인생이 강제로 수비 자리에 세우는 순간 처참하게 깨어지곤 한다.
영원한 공격수는 없다
팀장 A의 팀에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신입과 저연차 직원들이 유독 많았다. 보통은 다이아몬드형 인력 배치를 지향하지만, A의 팀은 구성이 조화롭지 않았다. 처음엔 우연이라 생각했지만 이유를 알게 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회의 도중 대놓고 한숨을 쉬거나, 문제가 생기면 "우리 팀원들이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그렇다"며 사람들 앞에서 팀원들을 깎아내렸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대들 수 있는 중간 기둥이 불편했던 듯, 고분고분하고 열정적인 신입 위주로 팀을 채웠다. 팀의 성장보다는 군림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팀원들은 하나둘 지쳐갔다. 누군가는 부서 이동을 준비했고, 누군가는 회사를 떠났다. 유관 부서 관리자였던 내 눈에 그는 그리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다. 과거의 경험과 연차에 기대어 현재의 문제를 풀려 했고,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느리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분명한 공격수였다.
육지가 바다가 되었다.
A는 개인 적인 일로 인해 약 2년간 휴직을 하게 되었고, 회사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가 돌아온 곳은 예전의 회사가 아니었다. 회사는 빠르게 성장했고 조직은 세분화되었다. 시스템도, 일하는 방식도 달라져 있었다.
무엇보다 사람이 달라져 있었다.
A가 면박을 주던 팀원들은 부서를 이동했고, 그곳의 핵심 인재로 성장했다. 누군가는 고속 승진을 했고, 어떤 이는 조직 내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되어 있었다.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변한다. 익숙했던 육지가 어느새 바다가 되어 버리기도 한다. 달리기는 누구보다 잘하지만 수영이 서툰 토끼는, 어느 날 갑자기 익사할 수도 있다. A의 눈에 거북이였던 그들이 너른 바다에서 빠르고 자유롭게 헤엄치고 있었고,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어 있었다.
한때 큰소리치며 가르치던 그는 이제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새로 들어오는 신입사원들은 과거 그의 팀원들보다 훨씬 더 개인주의적이고 효율성을 중시하며, 부당함을 ‘덜 참는’ 세대였다. 무시하고 윽박지른다고 곧이곧대로 받아듣는 사람은 더는 없었다. 그리고 A가 설 곳도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통쾌함보다는 묘한 씁쓸함을 느꼈다. 언젠가 나 역시 다른 방식으로 같은 자리에 앉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돌아온 공수교대
그리고 그 일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나도 출산을 하며 11개월의 휴직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갔다. 돌아간 회사는 내 기억과는 공기마저 다른 맛이 났다.
이전엔 키보드 위를 춤추듯 움직이던 손가락이 이제는 더듬더듬 멈춰 섰다. 새로운 시스템 앞에서 막막해질 때마다, 한때 내 밑에서 배우던 팀원들에게 다시 물어야 했다.
"이거 어떻게 하는 거였지?"
"이 프로그램은 언제 바뀐 거야?"
묻는 순간마다 자존심이 조금씩 깎여나가는 걸 느꼈다. 회사를 소개하고 시스템을 하나씩 알려주었던 내가, 팀원들이 해온 것을 평가하던 내가, 이제 가르치던 사람에서 배우는 사람이 된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우리 슬롯는 너무 빠르게 움직인다. 불과 백 년 사이 식민지와 전쟁을 겪었고, 경제성장을 이루었으며, 이제는 문화 강국이라는 이름까지 얻었다. 회사 역시 그 축소판이다. 사람들은 정말 빠르고 바쁘게 움직였고, 변화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익숙했던 방식은 낡아지고, 후배들은 어느새 새로운 시대의 언어를 익힌다. 지금의 신입사원들은 똑똑하고 빠르다. 정보 접근성도 뛰어나고, 부당함을 무조건 참지도 않는다. 그래서 더더욱 겸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내가 가진 경험과 지위가 영원히 유효할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인생은 공수교대를 시킨다.
가르치던 사람이 배우는 자리에 앉고, 구박하던 사람이 도움을 구하는 자리에 앉는다. 공격수였을 때는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수비수가 되어 반대편에 서는 순간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지금 몇 점을 내고 있는지가 아니라, 언젠가 반드시 공수가 바뀐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결국 인생에는 영원한 공격수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