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친구와 절교한 날, 나는 비로소 가벼워졌다
아들, 엄마는 성격이 참 모났어
나는 친구가 별로 없다
정확히 말하면, 남들 다 하는 '친구 관리'를 하지 않는다. 가끔 친한 친구를 만나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떠들지만, 정기적인 모임을 꾸리거나 의무감으로 얼굴을 비추지는 않는다. 그런 나를 보며 남편은 아들에게 농담조로 말하곤 한다.
"엄마는 성격이 참 모났어."
가끔은 내가 정말 결함 있는 사람인가 싶어 되짚어보기도 한다. 초중고와 대학을 거쳐 햇수로 17년의 슬롯생활을 하는 동안 정말 내 곁에 인연이 하나도 없었을 리가. 물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주로 ‘시절인연’과 대화하며 그 시기를 통과했다. 새로운 인연이 생기면 과거의 인연과는 자연스레 거리가 생겼고, 그럼에도 마음 깊숙이 자리 잡은 사람들과는 종종 안부를 이어갔다.
반대로 나는 성향이 맞지 않는다 싶으면 빠르게 ‘손절’하는 쪽을 택해왔다. 질투를 숨기지 못하는 사람, 무례함을 모르는 사람, 선을 넘는 사람들. 그들을 끊어낼 때마다 마음이 마냥 시원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
해수욕장에서 물놀이하다 입에 바닷물이 들어간 듯한 찝찌름한 뒷맛이 남았다. 뱉어내고 뱉어내고, 가글을 해도 입속에 남는 그 불쾌함. 그중 가장 시원 찝찔했던 일은, 무려 20년이라는 세월 동안 끌어온 인연을 마침내 도려낸 일이다.
부서진 추억의 액자를 버리다
나는 20년 지기 친구와 절교했다.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와 내가 더 이상 맞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나는 함께 보낸 어린 시절이 아까워 ‘추억’이라는 빛바랜 액자를 억지로 끌어안고 즐거움을 연기했다. 철없지만 싱그러웠던 시절의 내가 그리웠던 걸까, 아니면 그저 그 긴 시간에 들인 공이 아까워 미련을 떨어대던 것일까.
연기에 서툰 나의 진심에 공백이 생기기 시작하자, 그 빈자리를 채운 건 친구의 서운함과 원망이 섞인 감정 덩어리였다. 정기 모임에 나오지 않아서, 다 같이 모이는 여행에 참여하지 않아서 등등 그녀의 서운하다는 그 말들은 내가 간신히 들고 있던 추억의 액자에 날아와 꽂히는 돌멩이 같았다. 유리가 깨지고 사진마저 찢겨 너덜너덜해질 때쯤, 나는 결심했다.
“나 모임에서 나갈게”
깔끔하고 통쾌하게 끝나는 결말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타깝게도 나는 형편없는 작가였고, 우리의 끝은 아름다운 이별이 아니었다. 메시지창을 채우는 지루한 언쟁 속에서 그 친구는 물었다.
“주변에서 그러는데, 니가 나를 별로 안 좋아하는 거래. 정말이야?”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진실은 이것이었다. ‘맞아, 이제 너랑 있는 게 하나도 재미없어.’ 내가 그 차가운 진실을 포장하려 하다 보니 논쟁이 길어졌다. 악역이 되고 싶지는 않으면서도, 지루한 관계를 끌어가기는 싫은 비겁한 나의 변명은 나조차 설득하지 못했다. 나도 설득 못 하는 말을 어떻게 타인을 납득시킬 수 있었겠는가.
‘내 친구’라는 기만적인 인장
그 친구가 내 SNS에 달던 댓글들. 나는 그 댓글들이 왜 그렇게 불편했는지 오랫동안 몰랐다. “예쁘다, 내 친구”, “멋지다, 내 친구”. 나는 그저 “예쁘다, OO아”라고 이름을 불렀지만, 그 친구는 항상 그 앞에 ‘내 것’이라는 인장을 찍었다. "내 친구" 틀린 말도, 나쁜 말도 아닌데 읽을 때마다 뭔가 심기에 거슬렸다. 한참 지나서야 알았다. 그건 나를 부른 게 아니었다. 자기가 잃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말이었다. 나는 그녀의 세상 안에서 이름이 없었고, 그래서 불편했던 거였다.
그것은 우정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나를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하기보다, 자신의 인맥 리스트에 있는 ‘괜찮은 장식품’ 하나를 잃지 않았음을 과시하려는 소유욕. “너는 나를 안 좋아할지 몰라도, 어쨌든 너는 내 틀 안에 있어야 해”라는 무언의 압박. 그 기만적인 수식어가 불쾌하다고 말하는 순간, 나는 다시 별 것도 아닌 것으로 불편해하는 심보가 배배 꼬인 ‘모난 사람’이 되었다.
시절인연: 잘 놓아주는 법에 대하여
조금 더 세련되게 멀어지는 법을 알았더라면 단절이라는 극단에 다다르지는 않았을까? 회사 일은 회사 사람과, 드라마 이야기는 같이 보는 사람과, 좋아하는 아이돌은 함께 듣는 사람과 나누는 것이 가장 쾌적하다. 아무리 명작 드라마도 종영이 있고, 최고의 아이돌도 휴식기가 있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마냥 좋을 수도, 영원히 뜨거울 수도 없다.
나는 관계가 싫어지기 시작했다면 최악의 파국을 맞이하기 전에 ‘적당히 멀어지기’를 권한다. 내가 거리를 두려 할 때, 안타깝게도 그 친구는 ‘서운함’이라는 강력한 자석으로 나를 계속 끌어당겼다. 지쳐버린 내가 아예 등을 돌리면서 관계는 끊어졌다.
시절인연을 인정하자. 멀어지고 싶은 사람은 멀어지게 두고, 잡아두고 싶은 마음은 조용히 내려놓는 것 그것이 관계를 가장 덜 다치게 한다. 그리고 멀어지고 싶다면 악역을 자처해서라도 먼저 말하는 편이 낫다. 미적거리다 터진 파국보다, 조금 나쁜 사람이 되는 쪽이 서로에게 훨씬 덜 잔인하다.
서른이 넘어서까지 내 마음도 모르고 질질 끌려다니다가 참다못해 절교를 선택한 나 같은 ‘모지리’가 되지 말라는 뜻이다.
나는 모났다, 그래서 반짝인다
나만 예민한 것일까?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보다 특별하지 않다. 그녀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가 과거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 더 이상의 공통사가 없다는 것, 무엇보다 지루해하는 내 표정을. 그저 같은 시기에 즐거운 추억을 공유한 ‘시절인연’ 일뿐인데, 나는 그것을 너무 오래 끌고 왔다. 그리고 무거워진 추억은 어느새 짐이 되어 나를 짓눌렀다.
이제라도 놓아주니 어깨가 이토록 가벼울 수 없다. 그리고 나는 그 가벼워진 어깨로, 이제 나의 아이를 더 거뜬히 높게 업어준다. 타인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억지로 동그라미 인척 하지 않아도 괜찮다. 모두가 동그랗게 살아야 한다면, 세상에 보석이 존재할 이유가 있을까. 다이아몬드처럼 귀한 보석일수록 그 가치는 매끄러움이 아니라 정교하게 깎인 '각'에서 나온다. 수많은 모서리가 빛을 여러 갈래로 쪼개고 반사하기에, 보석은 비로소 보석답게 반짝이는 법이다.
그러니 누군가 성격이 모났다고 말해도 나는 이제 웃으며 수긍하려 한다.
“맞아, 나는 모났어. 그래서 이렇게 나만의 각도로 반짝이고 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