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예전 같지 않아도 공부하는 마음은 즐겁다
요즘 나는 시험을 앞두고 있다.
바카라상 위에는 문제집과 교재가 놓여 있고, 휴대전화에는 아직 듣지 못한 강의가 밀려 있다. 외워야 할 것도 많다.
그런데 큰일이다. 예전 같으면 몇 번 보고 기억했을 내용이 이제는 돌아서면 사라진다.
분명 읽었던 내용인데 문제에서 만나면 낯설다.
‘이걸 내가 공부했나?’
문제집을 넘기다 보면 가끔 처음 보는 사람과 마주 앉은 기분이다. 분명 만난 적은 있는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 사람처럼.
암기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은 이제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기억력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다. 바로 집중이다.
나는 한번 집중하면 오래 하는 편이다. 어떤 날은 한 가지에 빠져 밤을 새우기도 한다. 문제는 그 집중 상태에 들어가기까지가 어렵다는 것이다.
바카라을 펼쳐 놓으면 갑자기 다른 생각이 난다.
‘오늘 말씀묵상은 어떻게 정리할까?’
‘인스타에 올릴 사진은 뭐가 좋을까?’
‘아까 쓰다 만 글의 마지막 문장은 어떻게 끝내지?’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면 시험공부를 하려고 앉았던 사람이 어느새 글을 쓰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그게 훨씬 재미있다는 것이다.
아침마다 말씀을 읽고 내 삶에 비추어 생각해 보는 시간이 좋다. 그날 마음에 남은 생각을 짧게 정리하고, 사진을 골라 인스타에 올리는 일도 즐겁다.
글을 쓰는 재미도 새롭게 알아가고 있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 문장으로 만들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다가 오래 잊고 지냈던 장면이 떠오르기도 하고,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하루가 한 편의 글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시험공부가 자꾸 뒷전으로 밀린다.
그렇다고 공부를 그만둘 생각은 없다. 재미가 조금 덜하더라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공부는 해야 하니까.
최근에는 평생교육 강사로도 등록했다. 아직 어떤 강의를 하게 될지 모르지만, 그동안 배우고 경험한 것을 누군가와 나눌 기회가 생긴다면 좋겠다.
상담과 슬롯복지도 마찬가지다. 당장 어디에 쓰일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기회가 왔을 때 준비가 되어 있으면 좋겠다.
문제는 하고 싶은 일이 자꾸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공부하고 글을 쓴다고 하면 하루 종일 바카라상 앞에 앉아 있을 것 같지만 실제 내 하루는 전혀 그렇지 않다.
아침이 되면 먼저 집안일을 시작한다.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를 하고, 밥을 한다.
우리 집에서는 식사를 대부분 집에서 먹는다. 아침을 치우고 나면 어느새 점심을 생각해야 하고, 점심을 먹고 나면 또 저녁이 기다리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규칙적으로 돌아오는 일이 있다면 아마 밥때가 아닐까 싶다.
남편에게 커피를 만들어 주는 것도 매일 하는 일이다. 드립커피를 내리기도 하고 미리 준비해 둔 콜드브루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만들기도 한다.
빨래는 밀려 있는 것이 싫어 웬만하면 그날 나온 것을 그날 처리한다.
물론 귀찮은 날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내게는 오랫동안 익숙해진 생활의 리듬이다. 공부를 시작했다고 그 생활을 모두 바꾸고 싶지는 않다.
집안일을 하다가 베란다에 나가면 또 한동안 발길이 붙잡힌다.
식물들을 하나씩 들여다본다.
새 잎이 올라왔는지, 흙이 말랐는지, 햇빛이 너무 부족하지는 않은지 살핀다. 마른 잎을 떼어내고 화분의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가끔은 혼자 말을 걸기도 한다.
누가 보면 조금 웃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 시간이 좋다. 작은 잎 하나가 새로 올라오는 것을 발견하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그렇게 집안일을 하고, 식물을 돌보고, 말씀을 묵상하고, 글을 쓰다 보면 하루가 금세 지나간다.
여기에 교회 일도 있다.
오랫동안 사모로 살아왔으니 교회 일은 따로 떼어놓은 일정이라기보다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들어와 있다. 사람들을 만나고 챙기고, 필요한 일이 생기면 함께한다.
그러니 내 공부 시간은 그 사이사이에 만들어진다.
집안일을 끝내고 바카라상에 앉기도 하고, 저녁 일을 마친 뒤 밀린 강의를 듣기도 한다.
그렇게 어렵게 바카라상에 앉았는데 머리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 날도 있다.
같은 문장을 몇 번씩 읽다가 결국 바카라을 덮는다. 잠깐 글을 쓰거나 다른 일을 하다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반대로 집중이 잘되는 날에는 시간이 문제다.
‘이제 자야지.’
생각하면서도 한 문제만 더 풀고, 한 강의만 더 듣다가 밤이 깊어진다.
가끔은 새벽이 되어서야 노트북을 덮는다.
참 이상하다.
공부를 시작하기까지는 그렇게 딴생각이 많더니, 막상 시작하면 그만두기가 아쉬운 날도 있으니 말이다.
젊었을 때는 공부를 한다면 다른 일보다 공부를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모두 포기하면서 공부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바쁘다는 이유로 공부를 포기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엄마이고 아내이고 사모이며, 다시 학생이 된 사람이다.
요즘에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아보는 즐거움도 알아가고 있다. 앞으로 강의를 하게 될 수도 있고, 상담이나 복지 현장에서 일할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
무엇이 가장 오래 남을지는 아직 모른다.
그래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해보고 있다.
물론 한 가지만 하면 훨씬 잘할지도 모른다.
공부만 한다면 시험 준비가 조금 더 수월할 것이고, 글만 쓴다면 원고도 더 많이 쌓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렇게 한 가지만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다.
어떤 날은 집안일에 시간을 많이 쓰고, 어떤 날은 글 한 편을 쓰느라 공부를 조금밖에 못 한다. 또 어떤 날은 시험이 코앞이라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다.
그렇게 하루하루의 모습이 조금씩 다르다.
그래도 다시 바카라상으로 돌아온다.
시험 때문에 하고 싶은 모든 일을 미루지도 않고, 다른 일이 재미있다는 이유로 시험을 포기하지도 않으면서.
오늘도 바카라상 위에는 풀지 못한 문제집이 놓여 있다.
아까 분명 공부했던 내용인데 또 틀렸다.
‘아니, 이건 또 왜 틀린 거야?’
혼자 투덜거리다가 해설을 읽는다.
아, 이런 뜻이었구나.
그렇게 한 문제를 다시 이해하고 다음 장을 넘긴다.
그러다 문득 글에 쓰고 싶은 문장이 하나 떠오른다.
잠깐 고민한다.
‘이것만 적어놓고 다시 공부할까?’
아무래도 오늘 시험공부도 쉽지는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