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2029년 10월 17일
사진 속 남자의 오른쪽 새끼손가락은 안쪽으로 휘어 있었다.
샹들리에의 고정 장치를 풀었던 남자.
내 집 앞에 갈색 가죽시계를 떨어뜨린 침입자.
그리고 미래의 결혼식 날 나를 죽이는 남자까지.
모두 같은 사람이었다.
“이 손가락, 기억나요?”
나는 사진을 들고 우진을 바라봤다.
우진은 자신의 오른손을 펼쳤다. 다섯 손가락은 곧았다.
“지금은 다르죠.”
내 말에 그의 눈빛이 굳었다.
“하지만 3년 뒤에도 같을 거라는 보장은 없잖아요.”
재하가 내 앞을 막아섰다.
“이 사람 말부터 믿으면 안 돼. 미래에서 왔다는 것부터 확인해야 해.”
“확인할 방법이 있습니다.”
태경이 우진의 손에 들린 병원 팔찌를 가리켰다.
“저 팔찌에 일련번호가 있을 겁니다.”
우진은 잠시 망설이다 팔찌를 건넸다.
태경이 카메라 렌즈를 바꿔 팔찌 안쪽을 확대 촬영했다. 피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숫자가 화면에 나타났다.
환자번호 20291017-0347.
입원 일자 2029년 10월 17일.
환자 한서윤.
담당 의료진 아래에는 병동이 적혀 있었다.
미래아동센터 7층.
“아동센터?”
내가 물었다.
“내 이름으로 된 팔찌인데 왜 아동 병동이에요?”
우진이 대답했다.
“당신 팔찌가 아니니까요.”
“여기 내 이름이 적혀 있잖아요.”
“보호자 이름입니다.”
태경이 화면을 확대했다.
피에 가려진 작은 글씨가 드러났다.
환자와의 관계.
모.
그 아래 환자 이름은 날카로운 물건으로 긁혀 있었다.
하지만 첫 글자만은 남아 있었다.
봄.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봄이가 입원했던 병원이에요?”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식도 그 병원에서 열렸습니다.”
“병원에서 결혼했다고요?”
“봄이가 병실 밖으로 나갈 수 없었으니까요.”
낡은 건물의 출입문이 완전히 열렸다. 이번에는 병원 복도가 아니라 우리가 들어왔던 어두운 계단이 나타났다.
나는 피 묻은 봉투와 네 번째 사진을 챙겼다.
“전부 말해요.”
우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여기서요?”
“장소가 중요해요?”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그래서 더 들어야겠어요.”
나는 그의 앞에 섰다.
“2029년 10월 17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빼놓지 말고 말해요.”
우진은 한동안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죄바카라감과 두려움, 그리고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날은 당신과 내가 결혼하기로 한 날이었습니다.”
“그건 알아요.”
“결혼식은 오후 세 시에 시작할 예정이었어요. 장소는 한빛병원 7층 옥상 정원이었습니다.”
우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봄이는 한 달 전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살아남았지만 상태가 좋지 않았어요. 의사는 수술을 미루면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왜 수술하지 않았어요?”
“봄이가 거부했으니까요.”
“어린아이가 수술을 거부한다고 병원에서 그대로 둬요?”
“봄이는 평범한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숨을 멈췄다.
우진이 말을 이었다.
“검사 결과가 매일 바뀌었습니다. 혈액형도, 유전자 정보도, 몸속 장기의 상태도요. 전날까지 있던 수술 흉터가 다음 날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재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걸 우리보고 믿으라고?”
“믿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봄이는 대체 어디서 나타난 아이야?”
우진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2028년 11월 1일, 서윤 씨가 데려왔습니다.”
“내가요?”
“당신은 아이를 데리고 내 집으로 왔어요. 그리고 봄이가 우리 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봄이는 몇 살이었어요?”
“여섯 살이었습니다.”
재하가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이 2026년이야. 2년 뒤에 여섯 살짜리 아이를 데려왔다고?”
“그래서 처음에는 믿지 않았습니다.”
우진이 말했다.
“당신도 아이를 낳은 적이 없다고 했어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사진 속 봄이가 실제로는 미래에서 온 아이라면 나이를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의문이 생겼다.
“봄이는 나를 어떻게 찾아왔어요?”
“당신 작업실에 갑자기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사진 한 장과 편지를 가지고.”
“무슨 사진이었어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 비슷한 가족사진이었습니다.”
“사진 속 아빠는 누구였는데요?”
우진이 대답하지 못했다.
재하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
“너였냐고 묻잖아.”
“얼굴이 없었습니다.”
우진은 재하의 손을 떼어냈다.
“남자의 얼굴만 지워져 있었어요. 당신은 그 아이의 아빠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진 씨와 결혼한 거예요?”
“처음에는 아니었습니다.”
우진의 목소리가 조금 흔들렸다.
“봄이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였어요.”
“결혼이랑 치료가 무슨 상관인데요?”
“봄이가 말했습니다. 엄마와 아빠가 결혼해야 자신이 이 시간에 머물 수 있다고.”
내가 누구와 결혼하느냐에 따라 봄이의 아버지가 바뀐다.
아버지가 바뀌면 아이의 외모와 기억, 몸까지 달라진다.
그 때문에 검사 결과도 매일 변했던 것이다.
“그럼 봄이가 살기 위해 나와 결혼하려고 했다는 거예요?”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처음에는?”
우진이 나를 바라봤다.
“나중에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어두운 건물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재하가 시선을 돌렸다.
태경은 아무 말 없이 우진의 표정을 살폈다.
나는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고백이었다.
하지만 우진에게는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나는 우진 씨를 사랑했어요?”
“그건 내가 대답할 수 없습니다.”
“결혼까지 하려고 했다면서요.”
“봄이를 살리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으니까요.”
우진은 끝까지 내 마음을 대신 말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오히려 더 진실처럼 느껴졌다.
“결혼식 날 이야기를 계속해요.”
우진이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오후 3시 41분에 병원 전체가 정전됐습니다. 비상 전원도 작동하지 않았어요.”
“그리고요?”
“봄이가 병실에서 사라졌습니다.”
우진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당신은 봄이를 찾으러 병원 안으로 들어갔어요. 나는 결혼식장에 남아 하객들을 대피시켰습니다.”
“왜 같이 가지 않았어요?”
“당신이 혼자 가겠다고 했으니까요.”
“그 말을 들었다고 정말 혼자 보냈어요?”
내 목소리가 높아졌다.
우진의 표정에 고통이 스쳤다.
“그래서 후회했습니다.”
그는 3년 동안 그 순간을 되풀이한 사람처럼 보였다.
“3시 46분, 병원 안에서 총성이 들렸습니다. 내가 복도로 들어갔을 때 당신은 쓰러져 있었어요.”
“범인은 봤어요?”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습니다. 얼굴은 보지 못했어요. 붙잡으려 했지만 놓쳤습니다.”
우진이 피 묻은 병원 팔찌를 바라봤다.
“몸싸움을 하다가 그 남자의 시계가 끊어졌습니다.”
갈색 가죽시계.
내 집 앞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시계였다.
“그 시계는 지금 어디 있어요?”
내 질문에 우진이 대답했다.
“내가 가지고 왔습니다.”
“미래에서 여기로요?”
“당신이 죽은 직후 병원에 화재가 났습니다. 봄이를 찾다가 옥상으로 올라갔고, 거기서 편지를 발견했어요.”
“누가 보낸 편지였어요?”
“봄이였습니다.”
편지에는 2026년으로 돌아가 나를 찾아가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옥상에 있던 오래된 즉석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면 과거로 갈 수 있다고 했다.
우진이 셔터를 누른 순간 강한 빛이 터졌고,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2026년 9월의 거리 한복판에 쓰러져 있었다.
“한 달 전부터 나를 찾아왔다는 말은 절반만 진실이었네요.”
“그렇습니다.”
“시계는 어떻게 됐어요?”
“803호 금속 상자 안에 보관했습니다.”
“그런데 왜 내 집 앞에 떨어져 있었죠?”
“누군가 훔쳐 갔기 때문입니다.”
“누가요?”
“그걸 확인하기 전에 당신 집에서 비명이 들렸습니다.”
우진이 침입자와 싸운 그날 밤이었다.
누군가 미래에서 가져온 살인자의 시계를 훔쳐 내 집 앞에 떨어뜨렸다.
우진에게 의심이 향하도록 일부러 남긴 것이다.
“803호로 가야 합니다.”
태경이 말했다.
“상자 안에 남은 흔적부터 확인하죠.”
“지금도 남아 있을까요?”
내 질문에 우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는 곧바로 아파트로 돌아왔다.
803호 현관문에는 잠금장치가 세 개나 달려 있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자 거실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
벽에 붙어 있던 사진과 지도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서랍은 모두 열려 있었고 상자 속 물건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우진이 금속 상자로 달려갔다.
바닥의 숨겨진 공간은 비어 있었다.
“시계 말고 또 없어진 게 있어요?”
태경이 물었다.
우진의 얼굴이 굳었다.
“메모리카드가 없습니다.”
“무슨 메모리카드?”
“2029년 10월 17일 병원 CCTV 영상이 들어 있었습니다.”
재하가 우진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걸 왜 지금까지 숨겼어?”
“영상이 손상돼 있었으니까.”
“확인도 안 하고 숨긴 거야?”
“복구를 맡길 수 없었습니다. 3년 뒤의 영상이라는 걸 설명할 수 없으니까.”
태경이 뒤집힌 상자 안을 확인했다.
“크기가 어떻게 됩니까?”
“검은색 마이크로 SD카드입니다.”
태경은 잠시 생각하더니 카메라 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서 똑같은 메모리카드 하나를 꺼냈다.
“이겁니까?”
우진이 카드를 받아 들었다.
모서리에 은색으로 작은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1017.
“맞습니다.”
“그게 왜 태경 씨한테 있어요?”
내 질문에 태경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내 것이 아닙니다.”
“카메라 가방에서 나왔잖아요.”
“분명 없었습니다.”
재하가 차갑게 말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전부 똑같은 말만 하네.”
태경은 노트북을 꺼내 메모리카드를 꽂았다.
저장된 파일은 하나뿐이었다.
파일명은 2029_10_17_1547.
영상이 재생됐다.
병원 7층 복도가 나타났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내가 화면 오른쪽에서 뛰어왔다. 나는 무언가를 찾으며 병실 문을 하나씩 열었다.
잠시 후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반대편에서 나타났다.
갈색 가죽시계.
안쪽으로 휘어진 오른쪽 새끼손가락.
사진 속 남자와 같았다.
남자가 총을 꺼냈다.
화면 속 내가 뒤를 돌아봤다.
총성이 울렸다.
내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우진이 화면을 멈췄다.
“여기까지가 내가 본 장면입니다.”
“얼굴은요?”
“원본에서는 검게 가려져 있었습니다.”
태경이 영상의 밝기를 조정했다.
노출을 높이고 그림자를 줄였다. 검은 얼룩 뒤에서 남자의 턱선이 나타났다.
“조금만 더.”
나는 모니터 가까이 다가갔다.
코와 입술이 드러났다.
마지막으로 눈이 나타났다.
나는 숨을 쉬는 것도 잊었다.
화면 속 남자의 얼굴은 차우진이었다.
재하가 곧바로 우진을 벽으로 밀어붙였다.
“네가 죽였잖아.”
“아닙니다.”
“얼굴이 똑같은데도 아니라고?”
“나는 그 시간에 결혼식장에 있었습니다.”
“그걸 증명할 사람이 있어?”
“그 영상에 있습니다.”
우진이 모니터를 가리켰다.
“조금 더 재생하세요.”
태경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
화면 속 살인자가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정확히 11초 뒤, 반대편 계단에서 또 한 명의 남자가 뛰어왔다.
그 역시 차우진이었다.
두 번째 우진은 쓰러진 나를 발견하고 무릎을 꿇었다. 내 몸을 끌어안고 다급하게 이름을 불렀다.
살인자와 나를 안고 있는 남자.
같은 얼굴을 한 두 명의 차우진이 한 영상 안에 존재했다.
“저게 나입니다.”
내 옆에 선 우진이 말했다.
재하가 천천히 손을 놓았다.
태경이 살인자의 뒷모습과 두 번째 우진을 비교했다.
두 사람은 키와 체격까지 같았다.
단 하나 다른 것은 손가락이었다.
나를 안고 있는 우진의 오른쪽 새끼손가락은 곧았다.
나를 쏜 우진의 새끼손가락만 안쪽으로 휘어 있었다.
영상이 끝나는 순간 새로운 파일이 생겼다.
방금 전까지 없던 파일이었다.
2029_10_17_1548.
1분 뒤의 영상.
재생하자 병실 안이 나타났다.
한봄이라고 적힌 침대는 비어 있었다.
창가에는 파란색 환자복을 입은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일곱 살쯤 되어 보였지만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
아이 앞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살인자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봄이가 남자의 얼굴에 손을 댔다.
그러자 차우진의 얼굴이 물결처럼 흔들렸다.
우진의 얼굴 아래에서 또 다른 남자의 얼굴이 나타나려 했다.
하지만 화면이 심하게 깨져 알아볼 수 없었다.
스피커에서 봄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 아빠 얼굴로 엄마를 죽였으니까 아무도 진짜 얼굴을 찾지 못할 거야.”
살인자가 아이에게 물었다.
“약속은 지켜.”
“무슨 약속?”
“한서윤이 죽으면 너를 태어나게 해준다고 했잖아.”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내가 받은 편지 속 다정한 봄이와 전혀 달랐다.
“아저씨는 아직도 몰라?”
아이가 천천히 카메라를 바라봤다.
그 순간 얼굴을 가리고 있던 그림자가 사라졌다.
사진 속 세 아이 중 누구와도 다른 얼굴이었다.
네 번째 봄이였다.
“엄마가 죽어야 태어나는 건 내가 아니야.”
아이가 웃으며 말했다.
“아저씨야.”
영상이 끊겼다.
검게 변한 화면 위에 흰색 문장이 나타났다.
2029년 10월 17일, 죽은 사람은 한서윤 한 명이 아니다.
그 아래 두 번째 문장이 이어졌다.
세 남자 중 한 명은 이미 이날 죽었다.
나는 뒤에 서 있는 세 남자를 돌아봤다.
우진과 재하, 태경.
그 순간 사진 속 얼굴 없는 남자의 얼굴이 조금씩 복원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눈이었다.
그 눈을 본 재하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말도 안 돼.”
재하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사람은 내가 7년 전에 죽는 걸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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