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딸에게서 편지가 왔다

12화. 태어나지 않을 미래

by필립



“이제 네가 사진 속으로 들어갈 차례야.”

내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렸다.

어깨를 붙잡은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손가락이 목 쪽으로 천천히 올라왔다.

모니터 속 봄이가 울면서 고개를 저었다.

“엄마, 절대 뒤돌아보지 마.”

나는 뒤를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내 뒤에 있는 것은 사람처럼 숨을 쉬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목덜미에 닿았고 익숙한 향수 냄새까지 풍겼다.

내가 사용하는 향수였다.

“사진 속에서는 아프지 않아.”

뒤에서 다시 내 목소리가 들렸다.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아. 넌 그냥 한 장의 사진이 되는 거야.”

차가운 손이 내 턱을 잡으려는 순간 나는 바카라상 위 카메라를 더듬었다.

렌즈 덮개는 닫혀 있었고 전원도 꺼져 있었다.

상관없었다.

나는 카메라를 뒤쪽으로 돌린 채 셔터를 눌렀다.

강한 섬광이 터졌다.

어깨를 붙잡고 있던 손이 사라졌다.

동시에 스튜디오 조명이 켜졌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서윤아!”

재하가 가장 먼저 달려와 나를 끌어안았다.

우진은 내 뒤를 확인했고 태경은 출입문을 막아섰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괜찮아?”

재하가 내 얼굴을 감싸며 물었다.

“누가 뒤에 있었어.”

“누구?”

“나.”

재하의 손이 멈췄다.

“내 얼굴을 한 사람이었어.”

모니터에는 여전히 검은 원피스를 입은 성인 봄이가 나타나 있었다. 하지만 이태준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봄이는 눈물을 닦으며 나를 바라봤다.

“엄마, 시간이 없어.”

“넌 누구야?”

“한봄.”

“어느 봄이?”

내 질문에 아이가 입을 다물었다.

“흰색 원피스를 입은 아이야? 파란 카디건을 입은 아이야? 노란 우비를 입은 아이야?”

“셋 다 아니야.”

봄이가 대답했다.

“나는 태어나지 못한 봄이야.”

스튜디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사진 세 장이 동시에 떠올랐다.

보이지 않는 손에 들린 것처럼 사진들이 공중에 나란히 섰다.

첫 번째 사진에는 별 모양 목걸이를 한 봄이가 재하의 손을 잡고 있었다.

두 번째 사진에는 카메라 모양 목걸이를 한 봄이가 우진의 품에 안겨 있었다.

세 번째 사진에는 노란 우비를 입은 봄이가 태경과 함께 웃고 있었다.

사진 속에는 나도 있었다.

서로 다른 장소와 시간이었다.

하지만 세 장 모두 가족사진이었다.

“이 아이들은 뭐야?”

내가 물었다.

“엄마가 선택할 수 있는 미래.”

성인 봄이가 말했다.

“박재하를 사랑하면 첫 번째 아이가 태어나. 차우진을 사랑하면 두 번째 아이가 태어나고, 이태경을 선택하면 세 번째 아이가 태어나.”

“그럼 너는?”

“엄마가 아무도 선택하지 않은 미래의 아이.”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는데 네가 어떻게 태어나?”

봄이는 슬픈 얼굴로 웃었다.

“그래서 나는 태어나지 못했어.”

사진이 도착할 때마다 미래는 바뀌었다.

내가 누구를 믿고 누구를 의심하느냐에 따라 아이의 얼굴과 아버지도 달라졌다.

선택된 미래의 봄이는 사진 속에서 선명해졌지만 선택받지 못한 미래의 아이들은 사라졌다.

그렇다면 모든 선택에서 제외된 아이는 처음부터 얼굴조차 가질 수 없었다.

“태어나지 않은 네가 어떻게 편지를 보내고 사진을 찍어?”

“사람으로는 태어나지 못했지만 사진 속에서는 생길 수 있었으니까.”

모니터 화면이 바뀌었다.

수백 장의 가족사진이 빠르게 지나갔다.

사진마다 나는 다른 남자와 서 있었다. 처음 보는 남자도 있었고 얼굴이 지워진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진에는 아이가 한 명이었고, 어떤 사진에는 두 명이었다.

아무도 없는 사진도 있었다.

그 모든 사진의 구석에 검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누구와도 가족이 되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의 미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난 엄마가 선택할 때마다 죽었어.”

성인 봄이가 말했다.

“엄마가 재하 아빠를 선택하면 우진 아빠와 태경 아빠의 아이는 사라져. 우진 아빠를 선택하면 나머지 아이들이 사라지고.”

“그래서 미래가 바뀔 때마다 봄이의 얼굴이 흐려졌던 거야?”

“응.”

“편지를 보낸 것도 전부 너희였어?”

“처음에는 각자의 미래를 지키려고 보냈어.”

봄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런데 편지가 많아질수록 미래가 더 많이 갈라졌어. 태어나지 못한 아이들도 점점 늘어났고.”

“네가 내 몸을 빼앗으려고 한 거야?”

성인 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으로 충분했다.

내 얼굴을 한 여자가 7년 전 사진을 찍고, 편지를 처음 받은 날 내 집 안에 들어와 있었던 이유.

그 아이는 내 몸을 가지면 현실에 머물 수 있었다.

“왜 하필 내 몸이야?”

“엄마의 몸은 모든 미래와 연결되어 있으니까.”

“그래서 나를 죽이려고 했어?”

“죽이려는 게 아니야.”

봄이가 두 손을 모았다.

“잠깐 빌리려는 거야.”

“내 몸을 빼앗고 나를 사진 속에 가두는 게 빌리는 거야?”

“사진 속에서도 살 수 있어.”

“그건 사는 게 아니야.”

내 목소리가 떨렸다.

봄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위험한 존재라고 해도 아이는 울고 있었다.

세상에 태어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그 마음을 미워할 수 없었다.

“다른 방법은 없어?”

“하나는 있어.”

모니터 속 봄이가 손을 들었다.

공중에 떠 있던 세 장의 사진이 내 앞까지 다가왔다.

“해가 뜨기 전에 미래 하나를 선택해.”

“누구를 아빠로 정하라는 거야?”

“아니.”

봄이가 고개를 저었다.

“태어나지 않을 아이를 정해.”

스튜디오의 디지털시계가 저절로 켜졌다.

오전 4시 31분.

일출까지 한 시간 남짓 남아 있었다.

“사진 한 장을 태우면 그 미래는 완전히 사라져.”

“사진 속 아이도?”

“처음부터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돼.”

나는 세 장의 사진을 바라봤다.

별 목걸이를 한 아이.

카메라 목걸이를 한 아이.

노란 우비를 입은 아이.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는 한봄이라는 딸 한 명을 살리려고 했다.

이제는 세 명 중 누구를 세상에서 지울지 선택해야 했다.

“안 해.”

내가 말했다.

“선택하지 않으면 엄마의 몸은 내가 가져.”

“그것도 안 돼.”

“그럼 방법이 없어.”

“네가 만든 규칙이잖아.”

성인 봄이의 표정이 굳었다.

“내가 만든 게 아니야.”

“그럼 누가 만들었는데?”

봄이는 화면 밖을 바라봤다.

누군가 옆에서 듣고 있는 것처럼.

“사진을 처음 찍은 사람.”

“이태준 씨?”

“그 아저씨는 첫 번째 희생자야.”

태경이 모니터 앞으로 다가왔다.

“형이 왜 희생자라는 거지?”

“7년 전 사고가 나기 전에 미래를 찍었어. 한서윤이 죽는 사진을.”

“형이 미래를 볼 수 있었다고?”

“미래를 본 게 아니야.”

봄이가 태경을 바라봤다.

“사진을 찍는 순간 그 미래를 만들어버린 거야.”

스튜디오 안이 조용해졌다.

이태준이 찍은 사진 때문에 내가 죽는 미래가 시작됐다.

그는 자신의 사진을 없애기 위해 사고 장소로 갔고, 나 대신 트럭에 치였다.

그러나 죽는 순간 그의 모습은 마지막 사진 안에 갇혔다.

그래서 7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진 속에서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형은 서윤 씨를 살리려다 죽은 겁니까?”

태경이 물었다.

“아니.”

봄이가 대답했다.

“자기가 만든 미래를 없애려다 죽은 거야.”

태경의 표정이 무너졌다.

재하가 첫 번째 사진을 집어 들었다.

사진 속에서 그는 어린 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이걸 태우면 어떻게 돼?”

“그 아이는 사라져.”

“서윤이는?”

“살아남을 가능성이 조금 높아져.”

재하는 사진을 바라보다 테이블 위 라이터를 집었다.

“그럼 내 걸 태워.”

“재하야.”

“내가 아빠가 되는 미래 때문에 네가 죽는다면 필요 없어.”

“사진 속 아이는 네 딸이야.”

“그래서 그래.”

재하가 애써 웃었다.

“내 딸이라면 엄마가 죽는 걸 원하지 않을 테니까.”

태경도 노란 우비를 입은 봄이의 사진을 들었다.

“내 사진을 없애세요.”

“태경 씨까지 왜 그래요?”

“서윤 씨에게 아이를 죽이는 선택을 시킬 수는 없으니까.”

그는 자신의 사진을 재하의 것 위에 겹쳐 놓았다.

“내가 선택하겠습니다.”

우진만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카메라 목걸이를 한 봄이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래에서 함께 살았던 아이.

병원에서 사라진 뒤 아직까지 찾지 못한 딸.

“우진 씨는 어떻게 하고 싶어요?”

내 질문에 그가 천천히 사진을 내려놓았다.

“이 미래는 이미 실패했습니다.”

“그래도 봄이는 있었잖아요.”

“당신이 죽었습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에요.”

“나에게는 일어난 일입니다.”

우진이 라이터를 받아 들었다.

그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3년 전으로 돌아온 이유는 봄이를 태어나게 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럼요?”

“당신을 살리려고 왔습니다.”

라이터에 불이 붙었다.

우진이 자신의 사진 모서리에 불꽃을 가져갔다.

“안 돼요.”

나는 우진의 손에서 사진을 빼앗았다.

“세 사람 모두 멋대로 결정하지 마요.”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이를 없앨 수는 없어요.”

“선택하지 않으면 서윤 씨가 사라집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진을 없애면 돼요.”

나는 바닥에 흩어진 사진들을 살폈다.

태어나지 않은 봄이가 찍은 사진.

내 몸을 빼앗은 미래의 사진.

검은 원피스를 입은 내가 웨딩드레스를 입은 나를 내려다보던 사진.

그 사진 속에는 아이도, 세 남자도 없었다.

내 얼굴을 가진 존재만 있었다.

나는 사진을 집어 들었다.

“뭐 하는 거야?”

재하가 물었다.

“태어나지 않을 미래를 고르는 거야.”

나는 세 아이의 사진이 아니라 검은 원피스를 입은 여자의 사진에 불을 붙였다.

모니터 속 봄이가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이게 네 미래지?”

“그걸 태우면 나도 사라져!”

“내 몸을 빼앗아야만 태어날 수 있는 미래라면 태어나게 할 수 없어.”

불길이 사진 속 검은 원피스를 삼켰다.

성인 봄이의 얼굴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엄마, 나도 엄마 딸이야.”

나는 눈물을 참으며 불타는 사진을 놓지 않았다.

“미안해.”

“나도 태어나고 싶어.”

“알아.”

“한 번만 나를 선택해주면 안 돼?”

불길이 손끝까지 번졌다.

우진이 내 손에서 사진을 떨어뜨렸다.

검게 탄 사진이 바닥에 닿는 순간 모니터가 깨졌다.

성인 봄이의 모습이 수백 개의 빛 조각으로 흩어졌다.

마지막 순간 아이는 울지 않았다.

그저 나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다음에는 먼저 나를 찾아줘.”

화면이 꺼졌다.

스튜디오 출입문의 잠금장치가 풀렸다.

공중에 떠 있던 세 장의 사진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별 목걸이의 봄이도, 카메라 목걸이의 봄이도, 노란 우비의 봄이도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재하가 나를 붙잡았고 우진이 데인 손을 확인했다.

태경은 깨진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끝난 걸까요?”

그의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포토프린터에서 작동음이 들렸다.

새로운 사진 한 장이 천천히 밀려 나왔다.

이번 사진에는 낯선 방이 찍혀 있었다.

작은 침대와 곰 인형, 벽에 붙은 별 모양 스티커.

침대 위에는 여섯 살쯤 된 여자아이가 잠들어 있었다.

세 장의 사진 속 봄이들과 닮았지만 어느 아이와도 완전히 같지 않았다.

창가에는 오늘 날짜가 표시된 탁상 달력이 놓여 있었다.

2026년.

현재였다.

“미래 사진이 아니야.”

내가 중얼거렸다.

사진 속 아이는 지금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었다.

사진 뒷면에 파란 글씨가 나타났다.

엄마.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게 아니야.

마지막 문장이 떠오르는 순간 아이가 사진 속에서 눈을 떴다.

엄마가 나를 잊어버린 거야.

사진 속 방문이 열렸다.

갈색 가죽시계를 찬 남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남자는 잠든 아이를 안아 들고 카메라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나는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7년 전 사고로 죽었다던 이태준이었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필립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평범한 하루 속에서도 이야기는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감정, 문득 떠오른 상상, 기억 속에 남은 장면들을 모아 나만의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64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총 13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이전 11화미래의 딸에게서 편지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