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거짓말하는 남자들
조명이 다시 켜졌을 때 내 손목에는 네 번째 흉터가 남아 있었다.
우진과 재하, 태경의 흉터와 똑같은 위치였다.
나는 조금 전 나를 붙잡았던 사람을 찾았다. 하지만 세 개의 문 앞에는 세 남자만 서 있었다.
“방금 내 손 잡은 사람 누구야?”
세 사람이 동시에 나를 바라봤다.
“무슨 말이야?”
재하가 가장 먼저 다가왔다.
“누가 손을 잡았는데?”
“남자였어.”
나는 뒤로 물러나며 손목을 감쌌다.
“나한테 자기가 진짜 아빠라고 했어.”
태경이 손전등을 켜 주변을 비췄다. 사람이 숨을 만한 곳은 없었다. 창문은 막혀 있었고 출입문은 여전히 잠겨 있었다.
우진은 바닥을 살폈다.
“발자국이 없습니다.”
“분명히 있었어요.”
“서윤 씨가 잘못 들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진이 내 손목을 바라봤다.
“저 상처가 증거니까요.”
붉은 흉터에서는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피도 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내 몸에 있었던 흔적이 이제야 드러난 것처럼 피부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때 천장에 달린 스피커에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첫 번째 조건을 통과한 사람은 없습니다.”
세 개의 문 위에 켜져 있던 푸른 불빛이 붉게 변했다.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집니다.”
맞은편 벽에 새로운 문장이 나타났다.
숨긴 편지를 모두 공개하십시오.
나는 세 남자를 돌아봤다.
“숨긴 편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세 사람 모두 내게 보여주지 않은 편지가 더 있었다.
“꺼내요.”
내가 말했다.
“지금 당장.”
재하가 시선을 피했다.
“여기서 이걸 시키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하라는 대로 할 필요 없어.”
“또 숨기겠다는 거야?”
“널 지키려는 거야.”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은 왜 전부 나한테 거짓말을 해?”
재하의 입이 다물어졌다.
나는 우진을 바라봤다.
“우진 씨부터 보여줘요.”
“지금 공개하면 미래가 더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그 판단을 왜 우진 씨가 해요?”
“편지에 그렇게 적혀 있었으니까요.”
“그 편지를 보여달라는 거잖아요.”
우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태경도 카메라 가방을 몸 가까이 당겼다.
세 남자는 서로 다른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행동은 같았다.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벽의 글자가 바뀌었다.
제한 시간 3분 47초.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3분 46초.
3분 45초.
“시간이 끝나면 어떻게 되는데?”
재하가 천장을 향해 소리쳤다.
대답 대신 테이블 위에 놓인 세 장의 사진이 동시에 흔들렸다.
사진 속 아이들의 얼굴이 희미해졌다.
내가 한 장을 집어 들었다. 흰색 원피스를 입은 봄이의 오른쪽 눈이 지워지고 있었다.
“사진이 사라지고 있어.”
우진이 다른 사진을 들었다. 그의 사진 속 봄이는 파란색 카디건을 입고 있었다.
태경 앞의 사진에는 노란 우비를 입은 아이가 서 있었다.
같은 아이라고 생각했다.
눈매와 입술, 웃을 때 한쪽 볼에만 생기는 보조개까지 닮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세 사진을 나란히 놓고 보니 달랐다.
흰색 원피스를 입은 아이는 왼쪽 귀 아래에 작은 점이 있었다. 파란 카디건을 입은 아이에게는 점이 없었다. 노란 우비를 입은 아이는 오른쪽 눈썹 끝에 희미한 흉터가 있었다.
“이 아이들 정말 같은 봄이 맞아요?”
내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숫자는 계속 줄어들었다.
3분 12초.
나는 재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편지 줘.”
“서윤아.”
“7년 전에 받은 게 전부가 아니잖아.”
재하의 눈빛이 흔들렸다.
“어떻게 알았어?”
“전부였으면 지금 이렇게 망설이지 않았겠지.”
재하는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다 지갑을 꺼냈다. 안쪽 가죽을 손톱으로 밀어내자 얇은 틈이 벌어졌다.
그 안에서 아주 작은 종이 한 장이 나왔다.
처음 보는 편지였다.
종이에는 단 두 줄만 적혀 있었다.
아빠.
엄마를 다시 만나도 나를 모르는 척해야 해.
숨이 막혔다.
“이걸 언제 받았어?”
“첫 번째 편지와 같은 날.”
“7년 전에?”
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넌 처음부터 알고 있었네.”
“뭘?”
“편지를 보낸 아이가 네 딸이라고 생각했잖아.”
“확신한 건 아니야.”
“나한테는 왜 말하지 않았어?”
“네가 믿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아니.”
나는 편지를 그의 가슴에 밀어붙였다.
“내가 우진 씨나 태경 씨를 선택할까 봐 말하지 않은 거잖아.”
재하의 표정이 굳었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벽의 숫자가 멈췄다.
첫 번째 거짓말이 확인되었습니다.
재하 앞의 문이 검게 변했다.
사진 속 흰색 원피스를 입은 아이의 얼굴이 절반쯤 돌아왔다.
제한 시간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2분 41초.
이번에는 태경을 바라봤다.
“태경 씨 차례예요.”
“내가 가진 편지는 이미 보여줬습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왜 그렇게 생각하죠?”
“아까부터 카메라 가방을 한 번도 내려놓지 않았으니까.”
태경은 가방 끈을 쥔 채 움직이지 않았다.
재하가 그의 앞을 막았다.
“사진이 사라지는 게 안 보여?”
“보입니다.”
“그런데도 계속 숨길 거야?”
태경의 시선이 내 손에 들린 사진으로 향했다.
노란 우비를 입은 아이의 입술이 지워지고 있었다.
그가 결국 가방을 열었다.
카메라와 렌즈 사이에서 작은 녹음기를 꺼냈다.
“편지는 아닙니다.”
“그럼 뭐예요?”
“목소리가 왔습니다.”
태경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
잡음이 흐른 뒤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내가 보낸 사진을 엄마에게 들키면 안 돼.”
아이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엄마는 사진을 보는 순간 아빠가 누군지 알아볼 거야. 그러면 엄마는 결혼식 날 죽어.”
녹음은 거기서 끝났다.
나는 태경을 바라봤다.
“사진이 뭐예요?”
“없습니다.”
벽의 숫자가 더 빠르게 줄어들었다.
1분 58초.
“아직도 거짓말하잖아요.”
“정말 없습니다.”
“녹음 속 아이가 보낸 사진 말이에요.”
태경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나는 그의 카메라를 빼앗았다. 태경이 붙잡으려 했지만 재하가 그의 팔을 막았다.
“놔.”
“사진부터 보여줘.”
나는 카메라의 전원을 켰다.
촬영된 사진들을 빠르게 넘겼다. 결혼식장과 샹들리에, 도망치는 사람들의 모습이 지나갔다.
마지막 파일은 동영상이었다.
촬영 날짜는 2029년 10월 17일.
아직 오지 않은 미래였다.
재생 버튼을 누르자 결혼식장이 나타났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내가 버진로드 끝에 서 있었다. 얼굴에는 피가 묻어 있었고 한 손에는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영상 속 내가 렌즈를 향해 말했다.
“태경 씨, 이걸 보고 있다면 봄이를 데리고 도망가요.”
화면이 크게 흔들렸다.
누군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총성과 비슷한 소리가 들렸고 영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쓰러진 내 옆으로 남자의 구두가 나타났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손목에는 갈색 가죽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영상이 끝났다.
“이걸 언제부터 가지고 있었어요?”
“3년 전부터.”
태경이 대답했다.
“뭐라고요?”
“카메라를 중고로 구입한 날 저장되어 있었습니다. 삭제해도 다음 날이면 다시 생겼어요.”
“그럼 어제 처음 편지를 받았다는 것도 거짓말이었네요.”
“편지는 어제 받은 게 맞습니다.”
“하지만 3년 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잖아요.”
태경이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처음부터 서윤 씨를 찾고 있었습니다.”
벽에 문장이 나타났다.
두 번째 거짓말이 확인되었습니다.
태경 앞의 문도 검게 변했다.
노란 우비를 입은 아이의 얼굴이 다시 나타났다.
남은 시간은 1분 11초였다.
이제 우진만 남아 있었다.
“꺼내요.”
우진은 자신의 문 앞에 서 있었다.
“내가 가진 걸 공개하면 서윤 씨는 나를 믿지 못할 겁니다.”
“지금도 못 믿어요.”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더 나빠질 게 남았어요?”
우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59초.
58초.
파란 카디건을 입은 아이의 사진이 빠르게 지워졌다.
나는 우진의 코트 주머니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놓으세요.”
“보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 말도 이제 지겨워요.”
“후회할 겁니다.”
“그 후회도 내가 해요.”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편지가 아니었다.
작은 병원 팔찌였다.
환자 이름은 한서윤.
생년월일도 내 것과 같았다.
그 아래에는 입원 날짜가 적혀 있었다.
2029년 10월 17일.
퇴원 날짜는 없었다.
팔찌 뒷면에는 검붉은 얼룩이 묻어 있었다.
“이걸 어디서 났어요?”
우진이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남은 시간은 32초였다.
“우진 씨.”
“당신에게서 받았습니다.”
“미래의 나한테요?”
“아니요.”
우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지금의 당신에게 받았습니다.”
“우리는 어제 처음 만났잖아요.”
“당신은 나를 처음 만났지만 나는 아닙니다.”
“무슨 뜻이에요?”
우진이 자신의 왼쪽 손목을 내밀었다.
흉터 위 피부를 손가락으로 세게 문지르자 얇은 막이 벗겨졌다.
가짜 피부 아래에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17-10-2029
“나는 한 달 전에 편지를 받고 여기로 온 게 아닙니다.”
우진이 말했다.
“3년 전에서 왔습니다.”
남은 시간이 10초 아래로 떨어졌다.
나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미래에서 왔다고요?”
“당신의 결혼식이 열렸던 날, 나는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럼 내가 어떻게 죽는지도 알아요?”
우진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0초.
모든 숫자가 사라졌다.
세 번째 거짓말이 확인되었습니다.
우진 앞의 문이 검게 물들었다.
세 장의 사진 속 아이들이 동시에 모습을 되찾았다.
하지만 이상했다.
분명 닮았는데도 같은 아이가 아니었다.
서로 다른 옷 때문이 아니었다.
눈동자의 색도, 손가락의 길이도, 목에 걸린 물건도 달랐다.
흰색 원피스를 입은 아이는 별 모양 목걸이를 차고 있었다.
파란 카디건의 아이는 카메라 모양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노란 우비를 입은 아이의 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세 아이 모두 사진 속 여백에 같은 말을 남겼다.
우리 아빠를 믿지 마.
“우리 아빠?”
내가 중얼거렸다.
한 명의 아이가 보낸 경고라면 ‘아빠를 믿지 마’라고 적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 사진에는 전부 ‘우리 아빠’라고 적혀 있었다.
재하가 자신의 사진을 집어 들었다.
“이 아이들은 서로 다른 미래의 봄이야.”
태경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각자 자기 미래를 지키려고 편지를 보낸 겁니다.”
우진은 말이 없었다.
그가 가장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말해요.”
나는 우진에게 다가갔다.
“미래가 몇 개예요?”
“정확히는 모릅니다.”
“세 명의 봄이가 존재하는 거예요?”
“세 명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무슨 뜻이에요?”
우진이 내 손목을 바라봤다.
조금 전 생긴 네 번째 흉터가 검게 변하고 있었다.
“사진이 세 장이라는 건 확인된 미래가 세 개라는 뜻일 뿐입니다.”
“그럼 내 손목의 흉터는요?”
“편지를 받은 사람에게 생기는 흔적입니다.”
“나는 편지를 받은 적 없어요.”
우진이 고개를 들었다.
“아직 열어보지 않았을 뿐이겠죠.”
그 순간 잠겨 있던 출입문이 열렸다.
문밖에는 우리가 들어왔던 복도가 없었다.
밝은 조명이 켜진 병원 복도가 이어져 있었다.
벽에 걸린 전자시계에는 날짜와 시간이 표시되어 있었다.
2029년 10월 17일 오후 3시 46분.
내가 죽기 1분 전이었다.
복도 끝에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나였다.
미래의 나는 한 손에 피 묻은 봉투를 들고 있었다.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미래의 내가 입술을 움직였다.
“서윤아.”
내 목소리였다.
“세 남자 모두 봄이의 아빠가 될 수 있어.”
그녀가 천천히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하지만 세 사람 중 한 명은 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널 죽여.”
나는 옆에 선 남자들을 바라봤다.
미래의 내가 피 묻은 봉투를 내게 내밀었다.
봉투 앞면에는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한서윤에게.
손을 뻗는 순간 병원 복도에서 총성이 울렸다.
미래의 내 가슴에서 피가 번졌다.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안 돼!”
나는 복도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손에 닿은 것은 차가운 벽이었다.
병원도, 쓰러진 나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우리는 다시 낡은 건물 안에 서 있었다.
내 발밑에는 피 묻은 봉투만 떨어져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네 번째 사진이 들어 있었다.
사진 속에는 나와 봄이가 있었다.
우리 옆에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은 칼로 긁어낸 것처럼 훼손되어 있었다.
사진 뒷면에는 미래의 내가 쓴 문장이 남겨져 있었다.
세 사람 중 가장 먼저 진실을 말한 남자를 믿어.
나는 세 남자를 바라봤다.
재하는 7년 전부터 편지를 숨겼다.
태경은 3년 전부터 나를 찾고 있었다.
우진은 미래에서 왔다는 사실까지 감췄다.
“가장 먼저 진실을 말한 사람…….”
그 말을 입 밖으로 낸 순간 사진에 새로운 글자가 나타났다.
그런데 아직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않았어.
사진 속 얼굴 없는 남자의 손목에서 갈색 가죽시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의 오른쪽 새끼손가락은 안쪽으로 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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