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딸에게서 편지가 왔다

13화. 차우진에게도 편지가 왔다

by필립



사진 속 이태준은 살아 있었다.

현재 날짜가 적힌 방 안에서 잠든 아이를 안고 있었다.

“이 방부터 찾아야 해요.”

나는 사진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별 모양 스티커가 붙은 벽과 작은 침대, 낡은 곰 인형을 차례로 확대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건물은 흐릿했지만 옥상에 설치된 붉은 십자가만큼은 선명했다.

“병원 근처야.”

재하가 말했다.

“아니.”

우진이 사진을 자세히 살폈다.

“병원 안일 수도 있습니다.”

태경이 창가의 달력을 확대했다. 숫자 아래에 작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한빛병원 개원 30주년.

2029년 내 결혼식이 열릴 장소.

봄이가 입원하고 내가 죽는 병원이었다.

“한빛병원에 이런 방이 있어요?”

“지금 사용하는 본관에는 없습니다.”

우진이 대답했다.

“내가 있던 미래에도 이런 벽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태경이 휴대전화로 병원 건물 사진을 검색했다.

“구관이 하나 있습니다. 2019년에 폐쇄됐어요.”

2019년.

이태준이 죽은 해였다.

“폐쇄 이유는요?”

내가 묻자 태경의 손이 멈췄다.

“화재.”

화면에는 검게 그을린 병원 건물이 나타났다.

화재가 발생한 날짜는 2019년 9월 14일 오전 11시 17분.

이태준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날과 같았다.

사고가 일어나기 네 시간 전이었다.

“형은 사고 전에 이 병원에 있었던 겁니다.”

태경이 사진을 내려다봤다.

“서윤 씨와 함께.”

“나는 기억이 없어요.”

“누군가 기억을 지웠다면요?”

“사진이 바뀔 때마다 기억도 사라진다고 했잖아.”

재하가 말했다.

“봄이가 현재에 있다는 사실을 서윤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수 있어.”

내가 여섯 살 아이를 키웠다는 기억은 없었다.

임신한 적도, 아이를 낳은 적도 없었다.

하지만 미래에서 온 아이가 과거로 보내진 것이라면 출산하지 않고도 현재에 존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누가 봄이를 이 시간으로 보낸 것일까.

그리고 죽은 이태준은 왜 아이를 데리고 있는 것일까.

포토프린터가 다시 작동했다.

기계 안에는 인화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전원 코드도 태경이 뽑아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프린터 입구에서 흰색 봉투 하나가 천천히 밀려 나왔다.

봉투 앞면에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차우진에게.

우리의 시선이 우진에게 향했다.

“열어봐요.”

우진은 한동안 봉투를 바라보다 손을 뻗었다.

그가 봉투를 집어 드는 순간 왼쪽 손목의 흉터가 붉게 변했다.

편지를 받은 사람에게 생기는 상처였다.

이번 편지는 분명 우진에게 온 것이었다.

우진이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파란색 편지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편지를 읽는 그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뭐라고 적혀 있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또 시작이네요.”

나는 우진의 손에서 편지를 빼앗으려 했다. 그가 재빨리 손을 뒤로 숨겼다.

“보면 안 됩니다.”

“첫 번째 조건을 벌써 잊었어요?”

엄마에게 거짓말하지 않을 것.

그 조건에서 세 사람 모두 탈락했다.

우진은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거짓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럼 보여줘요.”

“당신이 읽으면 사진 속 아이가 위험해집니다.”

“그것도 편지에 적혀 있어요?”

우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재하가 그의 앞을 막았다.

“내놔.”

“비키십시오.”

“이번에도 혼자 판단하게 둘 것 같아?”

두 사람이 대치하는 사이 태경이 바닥을 가리켰다.

우진의 발밑에 작은 종이가 떨어져 있었다.

편지는 한 장이 아니었다.

우진이 편지를 꺼내는 순간 안쪽에 있던 두 번째 종이가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다.

내가 먼저 몸을 숙였다.

우진이 손을 뻗었지만 늦었다.

종이에는 봄이의 글씨가 적혀 있었다.

아빠.

엄마가 사진 속 방을 찾지 못하게 막아줘.

엄마가 지금의 나를 만나면 나는 사라져.

오늘 오후 3시 47분까지 한빛병원 구관 17번 보관함에 있는 검은 필름을 태워야 해.

절대 엄마와 함께 오면 안 돼.

나는 편지를 다 읽고 우진을 바라봤다.

“그래서 숨기려고 했어요?”

“당신이 읽으면 갈 게 뻔하니까요.”

“당연히 가야죠.”

“안 됩니다.”

“사진 속 아이가 내 딸일지도 몰라요.”

“그래서 막는 겁니다.”

“봄이를 찾지 못하게 하는 게 지키는 거예요?”

“그 아이를 만나는 순간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편지 내용이 진실이라는 보장은요?”

우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미래에서 온 편지들은 우리를 살리기도 했지만 끊임없이 거짓말했다.

재하를 떠나게 했고, 태경에게는 사진을 없애라고 했다.

우진에게는 나를 지키라고 하면서 동시에 나와 결혼하지 말라고 했다.

서로 다른 미래의 봄이들이 자신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

이번 편지도 마찬가지일 수 있었다.

“구관으로 갈 거예요.”

“서윤 씨.”

“우진 씨가 안 가면 나 혼자라도 가요.”

나는 사진과 편지를 가방에 넣었다.

우진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지금의 아이가 정말 당신 딸이라는 증거는 없습니다.”

“증거가 없으니까 확인하려는 거예요.”

“사진 속 이태준은 죽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진 씨는 3년 뒤에서 왔잖아요.”

나는 그의 손을 떼어냈다.

“죽은 사람이 현재에 있는 것보다 미래의 사람이 과거로 온 게 더 말이 안 돼요.”

우진의 표정이 굳었다.

“나한테 아직 숨기는 편지 있죠?”

“없습니다.”

“확실해요?”

그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없습니다.”

하지만 조금 전 우진이 편지를 쥐었던 손에는 접힌 자국이 두 개 남아 있었다.

내가 읽은 편지지는 한 번만 접혀 있었다.

그는 또 다른 종이를 주머니에 숨기고 있었다.

나는 모르는 척 돌아섰다.

한빛병원 구관은 도시 외곽에 있었다.

본관에서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떨어진 건물이었다. 녹슨 철문에는 출입 금지 표지판이 붙어 있었고 창문 대부분은 합판으로 막혀 있었다.

우리는 오후 세 시가 조금 넘어 건물 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차에서 내린 사람은 나와 재하, 태경뿐이었다.

우진이 없었다.

“차우진 어디 갔어?”

재하가 물었다.

우진은 스튜디오를 나올 때까지만 해도 우리와 함께 있었다. 각자 차를 타고 이동하자는 말을 한 뒤 연락이 끊겼다.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혼자 먼저 들어간 거예요.”

태경이 건물 옆에 주차된 검은색 차량을 가리켰다.

우진의 차였다.

그는 편지에 적힌 지시를 따르고 있었다.

절대 나와 함께 오지 말라는 지시.

“왜 굳이 혼자 들어갔지?”

재하가 출입문을 당겼다.

잠겨 있어야 할 철문이 힘없이 열렸다.

문 안쪽 바닥에는 파란색 종이 조각이 떨어져 있었다.

우진이 받은 편지와 같은 색이었다.

우리는 종이 조각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화재가 휩쓸고 간 복도에는 검은 그을음이 남아 있었다. 천장 일부가 무너져 전선이 늘어져 있었고 깨진 유리창 사이로 바람이 들어왔다.

1층 안내도에서 보관실 위치를 확인했다.

지하 1층.

계단을 내려갈수록 휴대전화 신호가 약해졌다.

지하 복도 끝에 낡은 보관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17번 보관함은 열려 있었다.

그 앞에 우진이 서 있었다.

“뭐 하는 거예요?”

내 목소리에 우진이 돌아봤다.

그의 손에는 검은색 필름이 들려 있었다.

바닥에는 라이터가 떨어져 있었다.

“태우려고 했어요?”

“왜 따라왔습니까?”

“나한테 숨기고 혼자 왔잖아요.”

“이 필름이 남아 있으면 아이가 위험합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어요?”

나는 필름을 빼앗으려 했다.

우진이 손을 뒤로 물렸다.

“편지에 적혀 있었습니다.”

“어느 편지요?”

우진의 눈빛이 흔들렸다.

“주머니에 숨긴 편지 보여줘요.”

“그런 건 없습니다.”

“손 펴봐요.”

“서윤 씨.”

“정말 없으면 보여주면 되잖아요.”

재하가 우진의 팔을 붙잡았다.

태경이 코트 안주머니에서 구겨진 종이를 꺼냈다.

우진이 곧바로 태경을 밀쳤지만 재하가 앞을 막았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주웠다.

오래된 편지였다.

한 달 전 받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종이 가장자리는 불에 그을렸고 군데군데 피가 묻어 있었다.

편지 첫 줄에는 날짜가 적혀 있었다.

2029년 10월 17일.

우진이 미래에서 과거로 오기 직전에 받은 편지였다.

차우진에게.

2026년으로 돌아가 한서윤을 찾아.

엄마가 널 사랑하게 만들어야 내가 태어날 수 있어.

하지만 엄마가 너를 끝까지 믿으면 결혼식 날 죽어.

엄마가 널 사랑하게 만든 뒤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배신해.

결혼식이 열리기 전에 엄마가 널 증오하게 해야 해.

나는 편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우진이 내게 접근한 이유.

처음부터 나를 알고도 모르는 척한 이유.

내가 그를 믿으려 할 때마다 일부러 밀어낸 이유가 편지 안에 전부 적혀 있었다.

“나를 사랑하게 만들려고 왔어요?”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버리려고 했고요?”

“그렇게 해야 당신이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봄이를 태어나게 하려고 나를 이용한 거네요.”

“아닙니다.”

“편지에 그대로 적혀 있잖아요.”

“미래에서 당신을 잃은 뒤에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우진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이 나를 미워해도 상관없었습니다. 살아 있기만 하면 된다고.”

“그래서 계속 거짓말했어요?”

“진실을 말하면 당신이 나를 불쌍히 여길까 봐 두려웠습니다.”

“그게 왜 두려운데요?”

우진이 한 걸음 다가왔다.

“불쌍해서 내 곁에 있는 건 사랑이 아니니까.”

그의 눈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3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함께 웃고 다투고 봄이를 돌보던 기억.

결혼식 날 나를 잃고 혼자 남았던 기억.

내게는 존재하지 않지만 우진에게는 분명히 있었던 사랑이었다.

“지금도 편지대로 움직이는 거예요?”

“아닙니다.”

“그럼 왜 필름을 태우려고 했어요?”

“이번 편지는 나를 아빠라고 불렀습니다.”

우진이 검은 필름을 바라봤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봄이가 보낸 편지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른 봄이일 수도 있어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나보다 편지를 믿었잖아요.”

우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의 손에서 필름을 가져왔다.

이번에는 저항하지 않았다.

필름을 비상등에 비추자 작은 사진들이 연속으로 나타났다.

한빛병원 복도.

검은 원피스를 입은 성인 봄이.

카메라를 든 이태준.

마지막 장면에는 병실 침대에 누운 어린아이가 찍혀 있었다.

사진 속 아이의 손목에는 환자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보호자 이름은 한서윤.

아버지 이름은 차우진.

“우진 씨의 봄이가 맞아요.”

내 말에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순간 복도 깊은 곳에서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사진 속에서 봤던 별 모양 벽지가 보였다.

반쯤 열린 문 너머에 작은 침대가 있었다.

우리는 동시에 방으로 달려갔다.

사진 속 방과 똑같았다.

침대 위에는 낡은 곰 인형이 놓여 있었고 바닥에는 어린아이의 신발이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봄이는 없었다.

열린 창문 앞에 이태준이 서 있었다.

사진으로 봤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태경이 그대로 굳었다.

“형.”

이태준이 천천히 돌아봤다.

그의 오른손에는 갈색 가죽시계가 채워져 있었고 새끼손가락은 안쪽으로 휘어 있었다.

“오랜만이네.”

태준은 동생을 보며 웃었다.

“어떻게 살아 있는 거야?”

“살아 있는 것처럼 보여?”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그의 몸을 통과했다.

이태준은 실체가 아니었다.

사진에서 빠져나온 잔상이었다.

“봄이는 어디 있어요?”

내 질문에 태준이 우진을 바라봤다.

“편지를 받았군.”

“당신이 보낸 겁니까?”

“나는 편지를 쓸 수 없어.”

태준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손끝이 오래된 필름처럼 검게 변하고 있었다.

“사진 안에 갇힌 사람은 이미 찍힌 장면만 반복할 수 있거든.”

“그럼 누가 보냈어요?”

태준이 침대 아래를 가리켰다.

작은 여자아이가 몸을 숨기고 있었다.

사진 속에서 봤던 여섯 살 아이였다.

아이는 곰 인형을 품에 안은 채 우리를 바라봤다.

내 얼굴을 확인한 아이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엄마.”

나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네가 봄이야?”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나를 기억하지 못해?”

“미안해.”

“엄마가 나를 여기로 보냈잖아.”

“내가?”

“나쁜 아저씨한테 들키지 말라고.”

“나쁜 아저씨가 누구야?”

아이는 대답 대신 우진을 바라봤다.

우진도 숨을 멈춘 채 아이를 보고 있었다.

“봄아.”

우진이 조심스럽게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아이는 침대 아래에서 기어 나왔다.

우진이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벌렸다.

“아빠야.”

아이는 잠시 망설이다 그에게 다가갔다.

우진의 얼굴을 두 손으로 만지고 눈과 코를 하나씩 확인했다.

그의 오른손도 살펴봤다.

곧게 뻗은 새끼손가락을 본 아이가 안도하는 듯 웃었다.

하지만 우진의 왼쪽 손목에 있는 흉터를 발견한 순간 표정이 굳었다.

아이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왜 그래?”

우진이 물었다.

“아빠 아니야.”

“봄아.”

“아빠는 그 흉터 없어.”

우진이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봤다.

편지를 받은 사람에게만 생기는 가느다란 흉터.

미래에서 봄이와 함께 살았던 우진에게는 없었던 흔적.

“그럼 이 사람은 누구야?”

내 질문에 봄이가 겁먹은 얼굴로 이태준을 바라봤다.

태준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말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봄이는 품에 안은 곰 인형의 지퍼를 열었다.

안에서 작은 봉투를 꺼냈다.

봉투 앞면에는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한서윤 엄마에게.

편지를 펼치자 봄이의 글씨가 나타났다.

엄마.

아빠에게도 편지를 보냈어.

하지만 그 편지를 읽은 사람은 아빠가 아니야.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우진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편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 문장이 나타났다.

진짜 아빠는 아직 2029년에 있어.

그 순간 우진의 손목 흉터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봄이가 비명을 지르며 내 뒤로 숨었다.

우진은 고통스러운 듯 손목을 붙잡았다.

피가 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그의 얼굴이 흔들렸다.

차우진의 얼굴 아래에서 다른 남자의 얼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갈색 가죽시계를 찬 이태준이 낮게 말했다.

“드디어 가짜 얼굴이 벗겨지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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