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돌아온 첫사랑
차우진의 집 안에서 모든 조명이 동시에 꺼졌다.
철컥.
현관문이 잠기는 소리까지 들렸다.
“이게 뭐예요?”
어둠 속에서 우진의 기척이 멀어졌다.
“움직이지 마요.”
“문부터 열어요.”
“내가 잠근 게 아닙니다.”
휴대전화의 손전등을 켰다.
희미한 빛 속에서 우진은 현관이 아닌 거실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청첩장과 미래의 사진이 놓여 있던 금속 상자가 혼자 흔들리고 있었다.
상자 안에서 무언가 긁는 소리가 났다.
드르륵.
드르륵.
나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저 안에 뭐가 있어요?”
우진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상자에 다가가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즉석사진과 청첩장도 사라진 뒤였다.
대신 상자 바닥에 처음 보는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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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우진은 엄마를 처음 만난 게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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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휴대전화를 든 채 우진을 바라봤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우진의 얼굴이 굳었다.
“나도 모릅니다.”
“아까는 한 달 전에 내 사진을 처음 받았다고 했잖아요.”
“사실입니다.”
“그럼 이건 뭔데요?”
“나한테 묻지 마요.”
우진이 상자를 닫으려는 순간 현관문 밖에서 거센 소리가 들렸다.
쾅.
“서윤아!”
재하였다.
나는 현관으로 달려갔다.
“재하야!”
“문에서 떨어져!”
“안 열려. 도어록도 작동하지 않아.”
“뒤로 가 있어.”
잠시 후 전동드릴 소리가 들렸다. 재하와 함께 온 관리 직원이 도어록 덮개를 강제로 열고 있었다.
우진이 내 뒤로 다가왔다.
“저 남자를 따라가지 마요.”
“왜요?”
“7년 전 편지 한 장 때문에 당신을 버린 사람입니다.”
“우진 씨는 편지 한 장 때문에 나와 결혼할 사람이면서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두 사람 다 똑같아요.”
나는 봄이의 사진을 움켜쥐었다.
“나를 위한 척하면서 결국 자기한테 필요한 것만 말하고 있어요.”
도어록에서 불꽃이 튀었다.
곧 잠금장치가 풀리며 문이 열렸다.
재하가 가장 먼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내 상태를 확인한 뒤 곧바로 우진에게 달려들었다.
“너, 서윤이한테 무슨 짓 했어?”
“손 놓으시죠.”
“문까지 잠가놓고 뭘 하려고 했는데?”
“내가 잠근 게 아닙니다.”
“그 말을 믿으라고?”
재하가 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두 사람이 몸싸움을 벌이기 전에 내가 사이를 막았다.
“그만해.”
“서윤아, 이 사람 위험해.”
“너도 마찬가지야.”
재하의 손이 멈췄다.
“7년 전에 편지 한 장만 남기고 사라졌잖아. 이제 돌아와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내 앞에 나타났고.”
“아무 일도 없었던 적 없어.”
“나한테는 그랬어.”
재하는 한참 동안 나를 바라봤다.
“나랑 가자.”
“어디를?”
“7년 전에 못 보여준 게 있어.”
“또 편지야?”
“아니.”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네가 나를 믿지 않아도 되는 이유.”
이상한 말이었다.
보통은 자신을 믿어달라고 해야 했다.
하지만 재하는 오히려 믿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보여주겠다고 했다.
우진이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다.
“보내지 않겠습니다.”
“당신한테 허락받을 생각 없어.”
재하가 차갑게 대답했다.
우진은 재하가 아니라 나를 바라봤다.
“편지에 적힌 대로라면 저 남자가 당신 곁에 있을 때 사고가 일어납니다.”
“7년 전 사고는 이미 피했잖아요.”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우진 씨 옆에 있어도 문이 잠겼어요.”
나는 봄이의 사진을 가방에 넣었다.
“지금은 누구 옆도 안전하지 않아요.”
그때 우진의 금속 상자 안에서 다시 긁는 소리가 났다.
우진이 뚜껑을 열었다.
사라졌던 즉석사진이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사진 속 인물은 달라져 있었다.
흰색 원피스를 입은 나와 어린 봄이는 그대로였다. 우진이 서 있던 자리에만 검은 얼룩이 번져 있었다.
미래의 아빠가 다시 사라진 것이다.
재하가 사진을 보려 했지만 우진이 먼저 상자를 닫았다.
“가죠.”
나는 재하와 함께 803호를 나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 우진이 말했다.
“박재하 씨.”
재하가 그를 돌아봤다.
“당신이 왜 돌아왔는지 알고 있습니다.”
재하의 표정이 굳었다.
“입 다물어.”
“서윤 씨에게 직접 말할 겁니까?”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야.”
“말하지 않으면 내가 알려주겠습니다.”
재하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는 것을 내가 붙잡았다.
“그만해.”
문이 닫혔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재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우진 씨가 무슨 뜻으로 말한 거야?”
“도착하면 말할게.”
“또 나중이야?”
“이번에는 전부 말할 거야.”
“네가 말하는 전부가 어디까지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
재하는 닫힌 문에 비친 나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믿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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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하가 데려간 곳은 호텔도, 그의 집도 아니었다.
우리가 7년 전 자주 갔던 오래된 사진관이었다.
건물은 재개발을 앞두고 있었다. 주변 가게들은 이미 문을 닫았고 사진관 유리창에는 영업 종료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여기가 아직 있었어?”
“오늘 철거할 예정이었어.”
재하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주인아저씨한테 부탁해서 하루만 미뤘어.”
문을 열자 먼지 냄새가 났다.
벽에는 오래전에 촬영한 가족사진과 증명사진이 그대로 걸려 있었다. 사진관 구석에는 내가 기억하는 작은 촬영실도 남아 있었다.
7년 전 우리는 이곳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결혼한 뒤 아이가 생기면 매년 가족사진을 남기자는 약속도 했다.
그런데 완성된 사진을 받기 전날 재하가 사라졌다.
“사진 찾으러 온 거야?”
“응.”
재하는 카운터 안쪽 서랍에서 노란 봉투를 꺼냈다.
봉투에는 촬영 날짜가 적혀 있었다.
7년 전 9월 13일.
재하가 사라지기 하루 전이었다.
안에는 사진이 두 장 들어 있었다.
첫 번째 사진에서는 나와 재하가 나란히 서서 웃고 있었다. 재하는 내 어깨를 감싸고 있었고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두 번째 사진은 촬영이 끝난 줄 알고 서로를 바라보던 순간이었다.
나는 웃고 있었지만 재하는 웃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표정은 뭐야?”
“그날 이미 편지를 받았으니까.”
재하가 대답했다.
“사진 찍기 전에 받았어.”
“그런데 왜 아무렇지 않은 척했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나는 사진을 내려놓았다.
“너한테는 마지막이었겠지.”
“서윤아.”
“나는 그것도 모르고 다음 날까지 널 기다렸어. 네가 사라진 뒤에도 매일 연락했고, 회사 앞에도 찾아갔어.”
“알아.”
“네가 어떻게 알아?”
“전부 봤으니까.”
“뭐?”
재하는 촬영실 구석에 있던 낡은 여행 가방을 꺼냈다.
가방 안에는 수십 개의 봉투가 들어 있었다.
각 봉투에는 날짜가 적혀 있었다.
내 생일.
우리가 처음 만난 날.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했던 날.
헤어진 뒤 1년, 2년, 3년이 되던 날.
재하가 가장 오래된 편지를 꺼내 내게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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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윤아.
오늘 네가 우리 집 앞에 세 시간 동안 서 있었다는 걸 들었어.
당장 달려가고 싶었어.
그런데 오후 3시 47분이 될 때까지 움직일 수 없었어.
네가 살아 있다는 연락을 받고 나서야 숨을 쉴 수 있었어.
미안해.
내가 널 사랑해서 떠났다는 말은 하지 않을게.
사랑한다면서 설명도 없이 사라지는 건 비겁한 일이니까.
그래도 네가 살아 있다면 나를 평생 미워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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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는 보내지 못한 채 봉투 안에 남아 있었다.
나는 다음 편지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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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윤아.
오늘 네 생일이네.
작년에는 네가 딸기 케이크를 먹고 싶다고 했는데 사주지 못했어.
올해도 사줄 수 없고.
편지에는 네가 나를 완전히 잊어야 안전하다고 적혀 있었어.
그런데 나는 네가 나를 잊기를 바라면서도 정말 잊을까 봐 두려워.
내가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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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 안의 편지는 7년 동안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쓰여 있었다.
“왜 보내지 않았어?”
“네가 나를 다시 찾을까 봐.”
“그게 뭐가 달라? 이렇게 써놓고 혼자 간직하면 나한테 미안하지 않은 사람이 돼?”
“아니.”
재하가 나를 바라봤다.
“내가 버틸 수 있었어.”
“너 편하자고 쓴 거네.”
“맞아.”
그는 변명하지 않았다.
“네가 읽을 거라고 생각한 적 없어.”
나는 편지를 다시 가방 안에 넣었다.
재하를 원망하고 싶었다.
그런데 편지마다 적힌 날짜를 보는 순간, 나와 헤어진 뒤 그 역시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그게 더 화가 났다.
“그럼 왜 이제 돌아왔어?”
재하는 지갑에서 7년 된 편지를 꺼냈다.
호텔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편지였다.
하지만 종이 뒷면에 작은 문장이 더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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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8월 29일이 되면 한서윤에게 돌아가.
그날부터는 네가 곁에 있어야 엄마가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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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은 왜 아까 보여주지 않았어?”
“네가 내가 돌아온 이유를 알면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았어.”
“당연하지.”
“나도 알아.”
“결국 네가 돌아온 것도 편지 때문이네.”
“처음에는 그랬어.”
“처음에는?”
재하가 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그런데 네 얼굴을 보는 순간 알았어.”
“뭘?”
“편지가 없어도 돌아왔을 거라는 걸.”
나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7년 동안 안 왔잖아.”
“네가 죽을까 봐 못 왔어.”
“이제는 안 무서워?”
“무서워.”
재하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런데 또 도망가면 이번에는 정말 네가 죽는대.”
“누가 그래?”
재하가 또 다른 봉투를 꺼냈다.
종이는 오래되지 않았다.
오늘 새벽에 받은 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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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하에게.
엄마는 차우진을 사랑하게 돼.
두 사람은 결혼하고, 그날 엄마가 죽어.
그 미래를 바꾸고 싶다면 엄마가 너를 다시 사랑하게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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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읽고도 한동안 아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를 여기로 데려온 거야?”
“아니.”
“나한테 편지까지 보여주고 옛날 사진을 꺼낸 이유가 뭐야? 다시 마음 돌려보려고?”
“그럴 생각이었으면 이 편지는 숨겼겠지.”
재하는 편지를 내 손에 쥐여줬다.
“네가 나를 다시 사랑하면 미래가 바뀔 수도 있어. 하지만 그게 네 선택이 아니라 편지가 시킨 선택이면 아무 의미도 없어.”
“그럼 뭘 원하는데?”
“용서해달라고 하지 않을게.”
재하가 말했다.
“다시 만나달라고도 안 할 거야.”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이번에는 사라지지 않을게. 네가 나를 미워해도 네 옆에 있을 거야.”
7년 전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하지만 너무 늦게 도착한 말이기도 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과거의 사진을 바라봤다.
우리가 행복했던 순간.
그때는 미래에서 온 편지도, 세 명의 남자도, 태어나지 않은 딸도 없었다.
사랑하면 함께할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었다.
“재하야.”
“응.”
“나는 네가 돌아오기를 정말 오래 기다렸어.”
재하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런데 지금은 모르겠어. 내가 기다린 사람이 너인지, 그때의 나인지.”
“알아.”
“그리고 널 믿을 수도 없어.”
“그것도 알아.”
“그런데…….”
나는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재하가 내 뺨에 손을 대려다 멈췄다. 손끝이 닿기 전, 그는 조용히 손을 내렸다.
예전의 재하였다면 나를 안았을 것이다.
지금의 재하는 내 허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순간 가방 안에서 종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봄이의 사진을 꺼냈다.
사라졌던 아이의 팔과 어깨가 다시 나타나고 있었다. 얼굴에도 조금씩 색이 돌아왔다.
미래가 또 바뀌고 있었다.
사진 속 스튜디오 유리창에는 새로운 형체가 비치기 시작했다.
나와 봄이 뒤에 서 있는 남자.
아직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입은 셔츠는 익숙했다.
재하가 지금 입고 있는 것과 같은 짙은 회색 셔츠였다.
“재하야.”
“왜?”
나는 사진을 가리켰다.
“네가 봄이 아빠일 수도 있어.”
재하가 사진을 받아 들었다.
아이의 얼굴이 선명해질수록 유리창 속 남자의 모습도 또렷해졌다.
턱선.
입술.
눈.
7년 만에 돌아온 내 첫사랑이 사진 속에서 봄이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박재하였다.
그 순간 내 휴대전화가 울렸다.
차우진에게서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지금 당장 박재하에게서 떨어져요.
메시지 아래에는 7년 전 교통사고 현장의 CCTV 캡처 화면이 첨부되어 있었다.
내가 재하를 찾아가던 날 발생한 사고였다.
인도로 돌진한 대형 트럭.
부서진 신호등.
그리고 사고가 일어나기 직전, 횡단보도 건너편에 서 있는 남자.
사진 속 남자는 카메라를 정확히 바라보고 있었다.
차우진이었다.
지금과 똑같은 얼굴이었다.
7년 전에도 그는 하나도 늙지 않은 모습으로 그곳에 서 있었다.
곧이어 우진의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
박재하는 7년 전 사고에 대해 거짓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천천히 재하를 바라봤다.
그도 내 휴대전화 화면을 보고 있었다.
“재하야.”
“서윤아, 저 사진부터 내려놔.”
“너도 우진 씨가 그곳에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재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내 손에 들린 과거의 사진을 빼앗으려 했다.
나는 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사진관 천장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작은 갈색 가죽시계였다.
어젯밤 우리 집 앞에서 발견된 것과 똑같았다.
시곗바늘은 멈춰 있었다.
오후 3시 47분.
사진 뒷면에 새로운 글자가 나타났다.
---
엄마.
재하 아저씨는 엄마를 구하려고 돌아온 게 아니야.
7년 전에 끝내지 못한 일을 다시 하러 온 거야.
---
문장을 읽는 순간 사진관 출입문이 저절로 잠겼다.
철컥.
재하가 내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7년 전과 똑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윤아.”
그의 왼손에는 갈색 가죽시계가 들려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설명할 때까지 아무 데도 가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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