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은 환불이 안 되나요: N회차 이직과 비전공자의 발버둥
회의가 시작된 지 벌써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테이블을 둘러싼 이들의 입에서는 연신 유쾌한 웃음꽃이 터져 나왔다. 어제 마신 와인 품종이 어땠느니, 새로 산 가방의 가죽 질감이 기가 막힌다느니, 편의점 신상 과자가 맛있다느니 하는 잡담이 꼬리를 물었다.
회의 주제가 무엇이었는지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논의할 안건이란 게 존재하기는 했을까.
어느덧 시계바늘이 11시를 가리키자, 갓 이사가 된 임원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대표에게 화사한 미소를 건넸다.
"자, 이제 11시니까 슬슬 회의 시작해 볼까요?"
그러곤, 30분 남짓 오늘 할 회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몇 마디를 주고받더니 대표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출한데 이제 밥 먹으러 갈까? 노아 팀장, 그때 거기 식당 예약 좀 해봐요."
그렇게 우르르 몰려나가 시작된 점심 식사와 디저트 시간은 오후 3시가 훌쩍 넘어서야 끝이 났다. 그 시간 내내 이들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화기애애했다. 사무실로 복귀해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 시간은 오후 3시 30분. 그리고 한 시간 뒤인 4시 30분, 대표실에서 나를 호출했다.
"노아 팀장, 어제 지시한 그 기획 분석 보고서 가져와 봐요."
어안이 벙벙했다. 그 보고서는 어제 퇴근 직전인 5시에 떨어진 업무다. 퇴근 전 한 시간, 오늘 출근 후 회의 시작 전 한 시간, 그리고 점심 먹고 돌아와 방금 전 보낸 30분. 실질적으로 내가 자리에 앉아 일할 수 있었던 시간은 다 합쳐봐야 겨우 2시간 30분 남짓이었다. 보고서는 아무런 방해 없이 꼬박 매달려도 최소 반나절은 걸릴 분량이다.
"아직 정리가 덜 되었습니다. 취합되는 대로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잔뜩 수그린 내 대답에 대표는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아니, 어제 나온 일인데 아직도 정리가 안 됐어요? 그동안 뭐 한 거예요?"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하루 종일 사적 잡담과 식사 자리에 병풍처럼 세워두고선, 정작 일할 시간은 단 1분도 주지 않은 채 바카라임을 떠넘기는 뻔뻔함.
이것은 내가 온라인 마케팅 회사를 그만두고 이직했던, 어느 대외적 평판이 자자한 슬롯적기업에서 겪은 경험담이다.
슬롯적기업이란 본래 취약계층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슬롯적 모순을 해결하는 공익적 가치를 좇는 조직이다. 정부와 지자체의 막대한 지원금과 세제 혜택이 주어지는 이유도 그 숭고한 취지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마주한 현실은 '착한 기업'이라는 껍데기를 쓰고 국가 지원금을 영리하게 털어먹는 거대한 위선 덩어리에 불과했다.
장애인 고용 비율을 맞춰 인건비를 보조받고, 2년짜리 청년 고용지원금 단물을 빨아먹기 위해 전 직원의 대다수를 2년 계약직으로 채워 넣는 구조. 그렇기에 조직에 대한 애정이나 업무에 대한 전문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정규직으로서 마케팅 팀장으로 들어온 내게 맡겨진 역할은 마케팅 전략이 아니라, 그럴싸한 공문서와 기획서를 만들어 지자체 평가 점수를 따내는 '페이퍼 워크'다. 원래 하던대로 그럴싸하게 포장만 하면 되는 식이다.
이 외에도, 이 회사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기괴하기 짝이 없다.
아침 9시에 출근하면 9시 40분까지는 커피를 마시고 담소를 나누는 '업무 준비 시간'이라고 칭했다. 퇴근 시간인 6시부터 6시 30분까지는 또 남은 이야기를 나누는 '퇴근 준비 시간'이라 불렸다. 게다가, 회의를 참 좋아하는 덕에, 정작 본업을 할 시간이 부족함에도 하루에도 서너 번씩 영양가 없는 회의가 끝도 없이 소집되었다.
내가 작성하는 보고서의 내용이나 마케팅 효율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경영진들이 목숨을 거는 것은 폰트의 크기, 제목의 자간, 공문서 좌우 정렬의 규격 같은 형식뿐이다. 그래야만 ‘공문서 다운 느낌’을 줄 수 있으니까.
더 나아가 서울의 유명 컨설턴트를 참여시켜 세상에 없는 공익 플랫폼을 만들겠다는 거창한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정작 이 프로젝트는 내가 근무하던 1년 6개월 동안 아무런 진척이 없었다. 남은 것은 영혼 없는 PPT 슬라이드와 실무자들의 야근뿐이었다.
회사 내에서는 상호 존중을 외치며 나긋나긋하게 말을 건넸지만, 공기는 숨이 막힐 만큼 폐쇄적이고 수직적이었다. 사무실 직원은 겨우 10명 남짓이지만, 직바카라 하나가 오르면 마치 신분이 상승한 양 굴었다. 참 얄팍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까다로운 육체노동이나 궂은일이 생기면 은근슬쩍 특정 인원들에게만 떠넘기며 뒷짐을 졌다. 차별과 우월주의가 뿌리깊은 곳이다.
밤 8시가 넘은 시각, 조용한 사무실에서 대표가 던져놓은 보고서의 자간을 맞추고 있을 때, 옆 자리의 한 계약직 직원이 씁쓸하게 뱉었던 말이 생각난다.
"팀장님, 여긴 회사가 아니에요. 그냥 저들이 '회사 놀이'를 하는 곳이죠. 대표는 대표 놀이에 취해 회의를 하면 회사가 잘 굴러가는 줄 알아요. 밖에서는 착한 기업이라고 박수 쳐주니까, 저들은 지들이 대단한 기업인인줄 알아요."
그의 말대로였다.
그곳은 공익적 가치를 위해 고민을 하는 슬롯적 기업이 아니었다. 국가 지원금이라는 정바카라을 영리하게 활용하여 대표는 사리사욕과 권력을 채우고, 임원들은 사적인 친목을 즐기며, 서류상으로는 완벽해 보이도록 잘 포장한 거대한 사기꾼 무리였다.
그렇게 잘 포장하기 위한 대가는 크다. 실무자들은 매일 밤 억지 야근과 대표의 변덕을 받아내야 했고, 나 또한 역류성 식도염이라는 쓰라린 훈장을 얻어내야 했다.
전공을 버리고 병원의 중바카라을 맡았던 나. 회사를 운영하며 슬롯가 돌아가는 것을 배우던 내가 이곳으로 이직을 결심했을 때 그려왔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다.
비록 벌이는 시원치 않을지언정, 내 손으로 취약계층의 자립을 돕고 건강한 시스템을 만들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발을 들인 곳이었다. 거창한 공익적 이상에 기여할 수 있다면 전공을 버리고 돌아온 내 지난 방황도 값진 밑거름이 될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곳은 공익의 탈을 쓴 채 세금을 축내는 좀벌레들의 서식지였고, 밥벌이의 기본조차 갖추지 못한 사이비 일터였다. 그 안에서 내가 배운 것이라곤 눈먼 보조금을 타내는 서류 조작법과 공무원의 비위를 맞추는 법, 그리고 영혼 없이 공문서 줄을 맞추는 잡기술뿐이었다.
진짜 시장의 파도를 타보지 않은 이들이 모여 벌이는 '회사 놀이'는 달콤해 보이지만, 그 대가는 고스란히 실무자의 시간과 영혼을 갉아먹는 것으로 청구된다. 공익이라는 달콤한 이름표 뒤에 숨어 실력 없이 안주하는 삶이 얼마나 기괴한 괴물을 만들어내는지 뼈저리게 목격한 순간이었다.
헛구역질을 참으며 자간을 맞추던 모니터를 끄고 생각했다.
전공이든 온라인 게임이든, 겉포장만 번지르르한 간판에 기대어선 안 된다. 내가 서 있어야 할 곳은 이런 기만적인 놀이터가 아니라, 부족하더라도 정직한 실력과 땀으로 가치를 증명하는 날것의 시장 바닥이어야 했다. 그리고 그 날, 나는 사직서를 작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