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은 환불이 안 되나요: N회차 이직과 비전공자의 발버둥
"아니지. 여기에 이걸 먼저 넣고, 저 큰 상자는 아래에 깔아야 흔들리지 않아. 어때, 쉽지?"
지게차용 목재 파레트 위에 상자를 빈틈없이 끼워 맞추자 흔들림 없는 단단한 성벽이 완성됐다. 곁에서 쩔쩔매던 신입 직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능숙하게 양손으로 공업용 랩을 쥐고 아래에서부터 위로 팽팽하게 감아 올렸다. 랩을 끊을 때 칼 따위는 사치다. 몸을 휘리릭 반 바퀴 돌려 대각선 방향으로 손목 스냅을 툭 주면 경쾌한 마찰음과 함께 깔끔하게 뜯겨 나간다. 그 모습에 또 다른 직원은 감탄하며 박수를 쳤다. 숨이 턱 끝까지 찼지만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유성 매직으로 박스 표면에 큼지막하게 〈대전〉이라 갈겨썼다.
"김 주임! 오라이! 이거 대한통운 1번 차로 빼!"
김 주임이 내 수신호에 맞춰 능숙하게 지게차를 몰았고, 파레트가 빠져나간 자리에 남은 송장과 출고 현황표를 대조하고 나서야 간신히 작업이 끝났다. 그러나 안도는 사치였다. 이제 겨우 1차 출고가 끝났을 뿐, 오늘은 당연히 야근이다. 대목인 추석은 이제 막 시작되었으니까.
바지는 흙먼지투성이에 온몸은 땀으로 절어 있었다. 사장의 시선을 피해 김 주임과 그늘진 벽 밑에 주저앉았다. 김 주임이 주머니에서 미지근해진 박카스를 꺼내 건넸다.
"팀장님, 이거 진짜 끝나기는 해요? 저 쓰러질 것 같아요."
박카스를 단숨에 털어 넣고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빨아들였다.
"추석 전날 정오까지는 이 짓 해야 해. 그래도 이번엔 내가 사전에 물량 쪼개놔서 이 정도지, 지난 설엔 장난 아니었어."
"설에요? 그때 물량 예측 누가 했는데요?"
"심 차장."
"아……."
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자마자 주머니 속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사장이다. 사무실 자리가 비어 있는 걸 귀신같이 알아채고 부르는 것이다. 발신자 화면을 김 주임에게 힐끔 보여주고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사무실 바카라상 위에는 출력해 둔 미처리 송장이 수백 장 쌓여 있었다. 재고가 어디에 얼마나 남았는지 전산과 현장의 숫자가 맞지 않는다. 그 누구도 재고가 몇개인지 모른다. 심지어 제품을 만들어내는 공장장마저 모른다.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파야 하는 법. 필요한 재고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송장 뭉치를 들고 제2공장 창고로 직접 뛰어가 '온라인팀'이라고 박스에 매직으로 표시를 해두어야 했다. 하늘은 시리도록 푸르렀고, 바람에 일렁이는 황금빛 벼들이 눈물 나게 평화로운 초가을이다.
이것은 병원 원무과를 박차고 나온 지 9년 뒤의 일이다.
병원 퇴사 후 5년 동안 직접 온라인 마케팅 회사를 공동 창업해 굴리며 산전수전을 겪었다. 데이터 분석, 키워드 광고, 상세페이지 기획, 쇼핑몰 입점과 전환율 계산까지. 시장 바닥에서 구르며 익힌 기술로 나는 제법 날카로운 마케터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경력을 인정받아 전남의 한 식품기업에 '온라인 마케팅 팀장'으로 당당히 입사했다.
당시 그 회사는 기업 간 대량 납품(B2B)에만 의존하고 있었고, 온라인 소비자 판매(B2C)는 백지상태였다. 대표는 광주에 별도의 온라인 사업 사무실을 열어주며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B2B를 담당하던 기존 심 차장과 새로 영입된 나, 그리고 휘하의 팀원 3명까지 총 5명이 팀을 꾸렸다. 제품 사진을 새로 찍고, 상세페이지를 갈아엎고, 이커머스 채널을 뚫었다. 마케팅 전문성을 가진 인력이 나뿐이었기에, 판매성과는 고스란히 내 몫이 될 터였다. 1년간 열심히 해서 매출이 좀 잡힌다면 유리한 연봉협상도 가능할 것이다. 이 부분은 사전에 조율이 되어 있었기에, 내 열정의 원동력이 되었다. 역시 최고의 복지는 현금이니까!
그 달콤한 착각은 입사 3개월 만에, 추석 명절을 두 달 앞둔 본사 전체 회의에서 산산조각 났다.
담양 본사 대회의실. 사장이 회의 테이블을 툭툭 치며 불쑥 나를 향해 물었다.
"노아 팀장, 이번 추석에 온라인에서는 뭐 팔 거예요?"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던 목구멍이 컥 막혔다.
"네? 그걸 왜…… 저한테 물으시죠?"
사장의 미간이 사납게 구겨졌다.
"아니, 뭘 팔지 말을 해줘야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낼 거 아닙니까. 상품 구성도 안 짰어요? 여태 그거 안 하고 뭐 했어요?"
"저희는 온라인 마케팅 조직입니다. 주력 선물세트 생산 계획과 판매 단가가 내려오면, 거기에 맞춰 상세페이지를 만들고 판촉 프로모션을……."
"그건 핑계지! 팔 물건을 마케터가 기획해야지 누가 합니까? 지난 설에 팔던 거 그대로 올리면 되는 줄 알았어요? 준비가 전혀 안 됐네. 광주 사무실 만들어줬더니 여태 놀고 있었던 겁니까?"
순식간에 회의실 공기가 얼어붙었다. 곁에 앉은 심 차장은 불똥이 튈까 두려운 듯 백지 노트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세상천지에 마케팅 팀이 상품구성에서부터 판매 단가까지 바카라임져야 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상품구성을 하려면, 세부 품목들의 유통 구조, 생산단가, 마진율, 공정률, 공장 회전율, 생산 루트와 공장 인력 구성. 무엇보다 공장 생산 스케줄까지 모두 손을 봐야 한다. 이것은 아무리 유능한 사원이라고 할지라도 혼자 기획하고 혼자 실행할 수가 없는 일이다. 엮인 일이 몇개이며, 엮인 팀이 몇곳인지 가늠조차 안된다. 하지만, 이러한 기본 지식과 데이터는 사장의 고함 앞에서 1원짜리 가치도 없었다. 나는 더 이상 할말이 없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회의 말미, 사장은 턱 끝으로 광주 팀을 가리키며 쐐기를 박았다.
"광주 사무실 따로 둬서 정신 상태가 해이해진 거야. 내일부터 명절 끝날 때까지 마케팅 팀 전원 담양 본사 공장으로 출근해요. 짐 싸서 컴퓨터 들고 내려와요."
회의실을 빠져나와 굳은 얼굴의 심 차장을 붙잡았다.
"차장님, 우리더러 상품 기획부터 공장 재고까지 다 바카라임지라는 건데, 이게 말이 됩니까?"
심 차장은 체념한 듯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팀장님, 여긴 그런 거 없어요. 각자도생이에요. 사장 머릿속에는 '전담 직원'이란 건 없어요. 명절에는 그냥 많이 팔아서 돈 남길 생각밖에 없거든. 그럴려면 직원들이 팔 물건 알아서 공장에서 낚아채 오고, 주문 들어오면 지게차 타고 박스 나르는 것까지 다 해야해요. 명절때는 사무직? 이런거 안통해요. 예상은 했지만 혹시 몰라서 말 안한건데, 역시 이렇게 됐네요."
중소기업의 뼈아픈 실체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회사는 나의 전문성을 존중해서 연봉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마케팅이라는 스펙은 그저 입사를 위한 최소한의 입장권에 불과했다. 조직이 진짜로 원하는 것은 내 전문 영역을 숨 쉬듯 기본값으로 깔아둔 채, 회사의 모든 아쉬운 구멍과 궂은일을 군소리 없이 몸으로 메워주는 '값비싼 헌신'이었다.
대부분의 중소기업에서는 전공과 경력을 앞세워 "이건 제 업무 범위가 아닙니다"라고 선을 긋는 똑똑한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조직 부적응자'라는 낙인이 찍힐 뿐이다. 그리고 결국 짐을 싸서 떠나야 한다. 반면, 전문성은 어설퍼도 위에서 시키는 대로 공장 바닥을 기고, 화장실 청소부터 커피 심부름까지, 진짜 닥치는대로 시키는 일에다가 일손이 부족해 보이는 남의 몫까지 끌어안으며 온몸을 갈아 넣어야만 '진짜 내 식구'라는 칭찬을 받으며 승진의 사다리에 오를 수 있다. 부족한 인력에 많은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중소기업의 한계라고 좋게 포장할 수도 있지만, 그것도 한 세월이지. 지금은 고생해도 회사가 커지면 다 개선시켜줄게요~라는 사장과 임원들의 달콤한 속삭임은 10년이 지나도 그대로다. 10년간 바뀌지 않는 제도, 바뀌지 않는 사장과 임원. 바뀌지 않는 ‘원래 그래’라는 ‘관행’은 10년이 지나도 발전하지 않는 회사가 되는 원인이다. 사장과 임원은 모른다. 회사가 왜 항상 그대로인지. 바꾸고 싶어도 왜 안바뀌는지. 하지만, 신입 직원들은 안다.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무엇이 회사를 병들게 하는지를. 그렇게 무언가를 바꾸려 하는 신입 직원들은 모두 잘리거나 못버티고 떠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위에서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하는 노예근성에 찌든 자들이 사장에게 아양을 떨며 하루 하루를 연명한다. 회사는 또 그렇게 10년이 지나도 발전하지 않을 것이다.
화려한 기획서와 데이터 분석 툴을 두드리던 내 손에는 어느새 공업용 랩과 박스 테이프가 들려 있었다. 사장이 원한 것은 마케팅 전략가였다. 하지만 이것은 당연한거다. 마케팅 전략가이면서, 명절 대목에 군소리 없이 까대기를 칠 수 있는 노예를 원했다. 사장은 ‘명절에는 바쁘니까, 이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땀에 절어 주저앉은 공장 구석에서 나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대한민국의 중소기업에서 전공과 전문성이란 결코 나를 지켜주는 방패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숫자를 쪼개고 키워드를 분석하는 화이트칼라의 노동은 그들의 눈에 그저 '앉아서 노는 짓'에 불과했다. 회사가 진짜 '일'이라 부르는 것은 눈앞에 쌓인 상자를 몸으로 나르고, 영혼까지 쥐어짜 내 바치는 헌신뿐이었다. "앉아만 있지 말고 일을 해." 지나가던 임원이 던진 그 짧은 한마디 속에, 비전공자와 전문직이 마주해야 할 냉혹한 생존의 법칙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회사는 언제나 당신의 전문성 그 이상을 원한다. 기본값 위에 얹어질, 군소리 없는 육체와 헌신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