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형 세탁기는 신문명이었다

인류사는 문명의 투쟁사다

by청산별곡


세탁기.png

이사를 하며 세탁기도 교체했다.


다용도실에 들어앉은 녀석은 거대했다. 세탁과 건조가 아래위로 한몸을 이룬 ‘일체형’이라는 이름의 신인류였다. 세탁기 앞에 섰다. 내 안에서는 최신형 스마트폰을 처음 손에 쥐었을 때의 짜릿함과 설렘, 그리고 행여 고장이라도 낼까 봐 두려운 소심함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아내와 나는 성경을 필사하는 수도승의 심정으로 사용설명서를 읽고 또 읽었다. 버튼 하나 잘못 누르면 이 거대한 문명이 폭발하기라도 할 것처럼.


‘시작’ 버튼을 눌렀다.

녀석이 눈을 깜빡이며 옷가지의 무게를 재기 시작했다.

스산한 기계음과 함께 계기판에 뜬 숫자.

'37분'.

통이 구르는 육중한 소리가 베란다를 채웠다.

이내 요란한 폭포수 대신 졸졸거리는 개울물 같은 다정한 소리와 함께 물과 세제가 스며들었다.

통이 돌기 시작했다.

헹굼을 거쳐 탈수까지, 첫 단추는 성공이었다.


다음은 건조였다.

축축한 빨래를 건조기 쪽으로 정중하게 모셔다 놓고, 다시 설명서라는 경전을 펼쳐 들었다.

문명의 속도를 따라잡기 위한 인간의 눈물겨운 정독이었다.

건조 시작.

또다시 엄숙한 무게 측정 후 형벌 같은 시간이 하사됐다.

"1시간 30분'


지루한 기다림 끝에 알람이 울렸을 때 마침내 구원받은 줄 알았지만, 현대문명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계기판이 불을 밝히며 새로운 선언을 내린 것이다.


구김방지 기능: 2시간


세탁 37분, 건조 1시간 30분, 거기에 옷이 구겨질세라 주기적으로 통을 굴려주는 구김방지 2시간까지 도합 4시간이다. 빨래 몇 장 세탁하려다 조선 시대 옹기 굽는 장인의 기다림을 배우게 될 줄이야.


시간은 그렇게 조용히 흘러갔고, 마침내 4시간의 긴 도를 닦고 문을 열자마자 뜨끈하고 포근한 온기가 품 안으로 쏟아졌다. 꺼내 든 옷감은 문자 그대로 뽀송함의 극치였다. 구김방지 기능 덕분인지 옷감의 구김이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빳빳하진 않아도 자연스럽게 잘 말라 있는 완벽한 결과물에 아내와 나는 동시에 소리쳤다.


“야, 신기한 현대문명이네! 성공이다!”


시간을 통째로 잡아먹는 괴물인 줄 알았더니, 영락없는 우렁각시였다.

그렇게 우리는 문명과의 첫 전쟁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둔 줄 알았다.


진짜 문제는 그다음 주말에 터졌다.

오랜만에 집에 온 아들이 본인 빨래를 하겠다며 세탁기 앞에 섰다. 그 녀석이 현대문명의 심장에 무시무시한 테러를 감행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우리는 그저 흐뭇하게 바라만 보았다.


아들이 서울로 떠난 뒤 세탁실로 향한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녀석은 이 최첨단 인공지능 듀얼 세탁기를 ‘수동’으로 조작해 자기 빨래를 하곤 그냥 떠났다. 자동 투입이라는 신문명의 친절을 가볍게 무시한 채, 세제 통을 열어 제멋대로 세제를 들이붓고는 대충 닫아놓은 모양새였다.


인공지능 칩이 박힌 21세기의 신문명을 순식간에 뗀석기 시절의 구석기 유물로 퇴화시켜 버린 것이다.


세제 통을 어찌어찌 다시 조립해 끼웠다.

진짜 통탄할 노릇은 도대체 액정 화면의 어떤 옵션을 건드려 놓았는지 알 길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매뉴얼을 펼쳐 들고 이것저것 누르며 설정을 재정비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빨래 시작. 계기판에 '27분'이 떴고 세탁과 탈수가 끝났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빨래를 건조기로 옮기려던 순간, 무언가 기이한 이질감이 촉각과 후각을 자극했다.

마땅히 풍겨야 할 세제와 섬유유연제의 향긋한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것이다.

오직 물에만 젖은 정직한 면직물의 냄새뿐이었다.


“아뿔사!”


뇌리를 스치는 불길한 예감에 계기판을 살펴보니, 세제 투입 옵션이 여전히 ‘수동’에 고정되어 있었다.

세탁기는 그저 27분 동안 맹물에 옷을 넣고 정성스럽게 흔들어댄 것에 불과했다.

아들이 쳐놓은 수동의 덫은 생각보다 깊고 집요했다.


나는 인내심으로 버티며 세제 투입을 ‘자동’으로 수정했다.

그리고 또다시 시작 버튼을 눌렀다. 계기판에 선명하게 찍히는 숫자 27분.

다시 졸졸 물이 투입되고 세제가 투입되며 통이 힘차게 돌기 시작했다.

맹물과의 사투 끝에 얻어낸 진짜 세탁의 서막이었다.


세탁기 유리 너머로 하얗게 부풀어 오르는 거품을 보고서야 비로소 가슴을 쓸어내렸다.

첨단 기계의 노예가 되어 베란다를 서성인 시간이 도대체 몇 시간인가.


자식 놈이 던지고 간 수동의 덫을 내 손으로 파헤치고, 문명의 이기를 다시 쟁취해 내는 과정은 흡사 잃어버린 고대 도시의 비밀 통로를 간신히 찾아낸 고고학자의 전율과도 같았다.


최첨단 가전을 들여놓고 4시간의 고행을 견뎌내며 감탄하기가 무섭게, 자식이라는 거대한 변수를 만나 다시 구석기 시대로 리부팅되는 역동적인 하루.


인류사는 문명의 투쟁사란 말을 실감한 하루였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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