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이사했다.
처음에는 공동현관 번호가 하나였다. 관리실에서 부여한 번호를 누르면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구조였다. 그때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현관 앞에서 번호 몇 자리를 누르면 문은 순순히 열렸다. 낯선 얼굴도, 택배 기사도, 배달원도, 이웃의 손님도 같은 숫자 앞에서는 모두 같은 사람이 되었다.
그러다 몇 번의 불편한 일이 이어졌다.
낯선 사람이 건물 안으로 들어왔고, 택배 분실 문제가 생겼고, 누군가를 확인하지 못한 채 문이 열리는 일이 반복됐다.
사람들은 불안해했고, 관리실은 대바카라을 세웠다.
결국 공동현관 비밀번호는 세대별 개인번호로 변경되었다.
안내문이 복도에 크게 붙었다.
관리실에서는 여러 차례 안내 방송도 했다.
새로운 번호를 사용하라는 말이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복도에서도, 안내문 속에서도 반복되었다.
그날 저녁, 난 번호를 눌렀다.
한 번,
두 번,
세 번.....
문은 열리지 않았다.
잠시 멍하니 번호판을 바라보다가 그제야 생각났다.
아하~ 바뀌었지.
별일 아닌 순간이었다. 그냥 새 번호를 누르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작은 사건 하나가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비밀번호가 바뀐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변화를 “깜박”했다는 사실이 충격으로 남았다.
우리는 참 많은 비밀번호를 가지고 살아간다.
아파트 현관,
휴대전화,
카드,
은행,
이메일,
각종 사이트 인증번호,
컴퓨터,
심지어 사무실 신발장까지.....
하루를 살기 위해 기억해야 할 숫자는 뇌의 한계를 벗어난다.
우리의 기억은 점점 정글처럼 복잡한 미로가 된다.
은행 앱이 말한다.
“본인 인증을 다시 해 주세요.”
휴대전화가 말한다.
“얼굴 인식을 할 수 없어요.”
매일 드나드는 우리 집 현관문조차,
“번호를 다시 눌러 주세요.”
어느새 나는 사람보다 기계에 더 많은 허락을 구하고 있다.
기술은 안전을 위해 발전했지만, 인간은 그 안전을 감당하기 위해 점점 불안해진다.
역설적이고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예전에는 대문 하나로 이웃이 연결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이 무조건 좋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때는 사람을 먼저 믿고, 문을 나중에 닫았다.
지금은 문이 먼저 닫히고, 사람은 나중에 확인된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연결될 수 있지만,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열지는 않는다.
비밀번호는 늘어나는데 안부를 묻는 일은 점점 줄어든다.
우리는 습관처럼 비밀번호를 만들고, 습관처럼 문을 잠근다.
오늘도 난 굳게 닫힌 문 앞에 서 있다.
번호는 바뀌었는데 손끝의 기억은 아직 바뀌지 않았다.
세상은 이미 업데이트되었는데, 내 몸은 아직 이전 버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