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의 저녁 식사
《얼굴 없는 사장님과 11박 12일》
3화. 바다 위의 저녁 식사
배가 항구를 떠난 뒤에도 강도윤은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당신 회사 이야기를 물어보세요.
조금 전 도착한 문자였다. 발신자는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누군가 장난을 친 것 같기도 하고, 우연히 잘못 보낸 문자 같기도 했다.
“누가 보낸 건지 모르겠네요.”
에블린 애슈퍼드는 문자를 읽고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오늘은 모르는 사람에게서 문자가 많이 오는 날인가 봐요.”
“이런 문자를 받고도 괜찮습니까?”
“괜찮다기보다, 배에 오른 첫날부터 걱정만 하면 아깝잖아요. 열한 밤이나 남았는데.”
그녀는 검은 카드를 코트 안주머니에 넣었다. 도윤은 카드의 은색 나방을 잠깐 바라보았지만 더 묻지 않았다.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억지로 캐묻고 싶지는 않았다.
“저녁은 드셨어요?”
“아직요.”
“그럼 같이 먹을래요? 혼자 먹는 것보다 낫잖아요.”
도윤은 잠시 망설였다. 휴가 첫날부터 낯선 여자와 저녁을 먹게 될 줄은 몰랐다. 더구나 그녀는 얼굴을 감추고 다니는 영국인 패션잡지 사장이라고 했다.
“좋습니다. 대신 제가 메뉴를 잘못 골라도 놀리지 마세요.”
“약속할게요. 아주 많이 놀리지는 않을게요.”
식당은 승객들로 붐볐다. 안내 직원은 두 사람을 창가 자리로 안내했다. 싱가포르의 불빛은 어느새 멀어졌고, 창밖에는 어두운 바다와 배의 불빛만 남아 있었다.
에블린은 선글라스를 벗어 식탁 옆에 놓았다. 도윤은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않으려 애쓰며 메뉴판을 펼쳤다.
“사람들이 당신 얼굴을 정말 몰라요?”
“잡지에는 제 이름이 나와도 사진은 거의 안 실려요.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꼭 얼굴을 보여주는 건 아니니까요.”
“그럼 불편한 점도 많겠네요.”
“많죠.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으면 사람들이 저를 알아보는 대신, 제가 누군지 궁금해해요.”
“저는 회사에서 제 이름보다 ‘잠깐 이것 좀’이라는 말을 더 많이 들어요.”
에블린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우리 둘 다 조금은 얼굴 없는 사람이네요.”
“제 얼굴은 유명해서가 아니라, 다들 바빠서 못 보는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메뉴를 고르며 한동안 농담을 주고받았다. 에블린은 매운 음식을 좋아한다고 했고, 도윤은 메뉴에 적힌 ‘스파이시’라는 단어를 믿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녀는 그 말을 듣고도 매운 요리를 주문했다가 첫 입을 먹자마자 물을 찾았다.
“이게 당신이 말한 매운 정도예요?”
“제가 경고했잖아요.”
“경고는 했지만, 웃지는 않겠다고는 안 했군요.”
그녀는 물을 마시고도 웃었다. 그 웃음은 승선장에서 들었던 차분한 목소리와는 조금 달랐다. 도윤은 그제야 그녀가 잡지 사장도, 얼굴을 숨긴 유명인도 아닌 한 사람의 여행객처럼 느껴졌다.
식사가 끝난 뒤 두 사람은 갑판으로 나왔다. 바람이 불자 에블린의 스카프 끝이 흩날렸다. 도윤이 스카프를 잡아주려다 손끝이 살짝 닿았다.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잠깐 두 사람 사이에 말이 끊겼다. 어색해서가 아니라, 굳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찾지 않아도 되는 침묵이었다.
“취소할 수 있었다면 정말 안 왔을 거예요?” 에블린이 물었다.
“아마 그랬을 겁니다.”
“그럼 오늘 저녁도 없었겠네요.”
“그러게요.”
도윤은 대답하고 나서 괜히 바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에블린도 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코트 주머니 속 카드를 손끝으로 확인하듯 한번 눌러보고, 다시 난간에 기대었다.
그때 도윤의 휴대전화에 문자가 하나 더 도착했다.
그녀가 일 이야기를 꺼내면, 세림무역의 봄 원단 계약을 물어보세요.
도윤의 표정이 달라졌다.
“이번엔 무슨 문자예요?”
에블린이 물었다.
도윤은 화면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미소가 조금 옅어졌다.
“세림무역… 그 회사 이름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 잡지의 다음 봄호에 들어갈 원단을 한국에서 들여오고 있어요. 계약을 진행한 회사가 바로 세림무역이에요.”
도윤은 난간에서 몸을 뗐다. 자신이 맡은 품목은 아니었지만, 회사에서 봄 원단 계약에 관한 서류를 본 기억은 있었다.
“그럼 이건 우연이 아닐 수도 있겠군요.”
에블린은 잠시 문자를 바라보다가 휴대전화를 돌려주었다.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오늘 밤만큼은 일 이야기 여기까지만 해요.”
“좋습니다. 대신 다음엔 매운 음식의 기준부터 다시 정하죠.”
“좋아요. 다음 저녁도 같이 먹는다는 뜻으로 알아들어도 될까요?”
도윤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에블린은 이미 바다 쪽으로 돌아서 있었다. 스카프가 바람에 흔들리고, 배는 두 사람을 태운 채 어두운 수평선을 향해 나아갔다.
그녀의 코트 안주머니에서 검은 카드 한 장이 조금씩 밀려 나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아직 그 사실을 몰랐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