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평가를 걷어낸 자리에 남은 가장 담백한 나
퇴사 후 가장 먼저 찾아온 낯선 감정은 해방감 이면에 숨어 있던 '공백'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쉼 없이 돌아가던 쳇바퀴에서 훌쩍 뛰어내리자, 갑자기 내게 남겨진 거대한 시간과 공간이 몹시도 어색했다. 무언가를 생산해 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조바심, 소속된 곳이 없다는 묘한 불안감이 수시로 밀려왔다. 우리는 왜 이토록 '비어 있음'을 견디지 못하는 걸까.
온라인 게임인 시절, 나의 의자는 단 하루도 가벼운 적이 없었다. 직함이라는 묵직한 방석이 깔려 있었고, 등받이에는 타인의 기대와 켜켜이 쌓인 업무라는 무거운 외투가 항상 걸쳐져 있었다. 그 화려하고 무거운 장식들이 곧 나의 가치이자 존재 증명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의자가 조금이라도 비워질 틈이 보이면, 불안한 마음에 쓸데없는 인맥이나 과도한 바카라임감으로 그 자리를 꾸역꾸역 채워 넣곤 했다.
모든 타이틀을 내려놓고 맞이한 새벽 4시. 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나의 빈 의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화려한 직함도, 처리해야 할 서류 더미도 없는 온전한 나무 의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의자는 비어 있을 때 가장 정직하구나.
무언가를 올려두어야만 쓸모를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텅 비어 있음으로써 언제든 진정한 주인을 품을 준비를 마친 상태. 억지로 꾸며내거나 남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 없이, 오직 나라는 사람의 무게만을 온전히 지탱해 줄 수 있는 가장 순수한 본질만이 그곳에 남아 있었다. 공백은 결핍이 아니라, 내 삶의 캔버스를 새롭게 칠할 수 있는 완벽한 바탕색이었던 것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채우라고 강요한다. 이력서의 빈칸을 채워야 하고, 통장의 잔고를 채워야 하며, 주말의 스케줄을 화려하게 채워야만 성공한 인생이라고 속삭인다. 하지만 정작 그 속에서 나 자신은 질식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늦게 깨닫는다.
이제 나는 억지로 내 의자를 채우려 아등바등하지 않기로 했다. 불안감을 달래기 위해 가짜 바쁨을 만들어내거나, 의미 없는 관계들로 내 주위를 포장하지 않을 것이다. 비어 있는 시간은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소음 속에서 듣지 못했던 내 내면의 목소리를 듣게 해주는 가장 정직한 스피커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의 의자는 어떤 모습인가. 혹시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그럴싸한 장식품들로 짓눌려, 정작 당신이 편히 기대어 쉴 공간조차 남아있지 않은 것은 아닌가.
두려워하지 말고 과감하게 그 짐들을 덜어내 보라. 텅 빈 의자가 주는 서늘한 정직함을 마주할 때, 당신은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이다. 당신의 가치는 의자 위에 놓인 수많은 타이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비어 있는 의자에 기꺼이 앉을 수 있는 당신이라는 존재 자체에 있다는 것을.
타인의 평가를 걷어낸 자리에 남은 가장 담백한 나
의자를 비우는 것만으로 시작되는 내 삶의 주권
by 쉼표 JEONG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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