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안에 가구를 들일 때 우리는 대개 무엇을 놓을 곳부터 생각한다. 바카라상은 어디에 둘까. 바카라장은 어느 벽에 놓을까. 의자는 어디가 좋을까. 그런데 가구를 하나씩 들여놓다 보면 어느 순간 방이 답답해진다. 필요한 것은 다 있는데 편안하지 않다. 왜 그럴까. 어쩌면 비어 있어야 할 곳까지 채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컵이 쓸모 있는 까닭
노자는 『도덕경』 제11장에서 참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다.
埏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연식이위기 당기무 유기지용)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들지만 실제로 그릇을 쓸 수 있게 하는 것은 그 안의 빈 공간이라는 뜻이다.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는 철학적인 비유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래 살아보니 아주 생활적인 말이었다. 찻잔이 쓸모 있는 것은 아름다운 도자기 때문만이 아니다. 차를 담을 빈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방도 벽만으로 쓸모가 생기지 않는다. 그 안이 비어 있기 때문에 사람이 들어가 살 수 있다. 문도 마찬가지다. 벽을 세우면서 일부를 비워놓았기 때문에 드나들 수 있다.
결국, 있는 것이 형태를 만들지만 없는 것이 쓰임을 만든다.
일정표의 빈칸
한때는 일정표가 빽빽하면 잘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회의, 출장, 약속, 업무, 공부. 빈 시간이 있으면 무엇인가를 더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일정이 가득 차면 뜻밖의 것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오랜 친구가 갑자기 차 한잔하자고 해도 시간이 없다. 좋은 바카라을 만났는데 천천히 읽을 여유가 없다. 날씨가 좋아 산길을 걷고 싶어도 이미 일정이 꽉 차 있다.
무엇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 자신과 머물 시간이 사라진다. 그래서 요즘은 일정표의 빈칸도 하나의 일정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시간이야말로 무엇이든 들어올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빈 의자 하나
사람 사이에도 빈자리가 필요하다. 내 생각으로 상대의 마음을 꽉 채우지 않는 것. 상대가 말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는 것. 침묵이 생겼다고 서둘러 말로 메우지 않는 것. 그런 여백이 있어야 다른 사람의 생각이 들어온다.
회의에서도 내가 계속 말하면 다른 사람은 들을 수밖에 없다. 내가 조금 말을 멈추면 누군가 입을 연다.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그 한마디가 조직을 바꿀 수도 있다. 내가 비워둔 말 한마디의 자리에 다른 사람의 생각이 앉는다. 이것이 비움의 쓸모다.
떠난 사람의 자리
비어 있는 자리가 언제나 편안한 것은 아니다. 누군가 떠난 뒤 남겨진 의자처럼 아픈 빈자리도 있다. 함께하던 사람이 떠나고 나면 그 자리가 유난히 크게 보인다. 그때 우리는 빈 곳을 빨리 채우고 싶어 한다.
하지만 어떤 자리는 서둘러 채우지 않아도 된다. 잠시 비워두어야 그 사람이 내 삶에서 어떤 존재였는지 알게 되기도 한다. 부재가 존재의 크기를 알려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삶의 모든 빈칸을 채울 필요는 없었다. 어떤 빈자리는 기억이 머무는 자리이기도 했다.
조직에도 빈자리가 필요하다
회사를 운영하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한다. 대표가 모든 것을 채우고 있으면 다음 사람이 들어설 공간이 없다. 결정도 내가 하고, 아이디어도 내가 내고, 문제도 내가 해결하면, 겉으로는 빈틈없는 조직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빈틈없음이 오히려 사람을 자라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일부러라도 자리를 조금 비워야 한다.
“이번에는 자네가 결정해 보게.”
그 한마디가 작은 빈방 하나를 만들어준다. 처음에는 어색하겠지만 누군가는 그곳에 자기 판단과 바카라임을 채워 넣는다. 사람을 키우려면 때로 내가 차지한 공간부터 줄여야 했다.
노자의 제11장은 결국 ‘없음’을 예찬하는 말이 아니라 있음과 없음이 함께 쓸모를 만든다는 이야기로 내게 다가온다. 채우는 것도 필요하고 비우는 것도 필요하다.
일할 때는 일하고, 쉴 때는 빈 시간을 남긴다.
말해야 할 때는 말하고, 들어야 할 때는 침묵한다.
사람을 이끌 때는 앞에 서고, 그 사람이 자라면 한 걸음 물러선다.
삶은 그렇게 채움과 비움 사이에서 깊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빈자리를 보면 무조건 채우고 싶지는 않다. 그곳에 바람이 지나가도록 조금 두고 싶다. 어쩌면 내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이 그 빈자리로 들어올지도 모르니까.
가득 찬 곳에는 더 들어올 것이 없지만, 비워둔 자리에는 아직 가능성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