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눅한 계절에 피어나는 생의 나이테
산그늘 짙어오는 오후
창을 열면
일 년의 반을 앓아온 바람이
젖은 눈빛으로 고여 듭니다.
볕살 아래 부유하는 먼지들의 춤
나는 어제쯤의 귀퉁이에서
길 잃은 나비처럼 서성입니다.
쏟아질 폭우의 무게를
가느다란 잎새마다 받아내는 저 강아지풀
어둠을 삭여 초록을 피우는 일.
낡은 뚜껑을 닫고
묵묵히 제 안의 시간을 빚는 장독처럼
여름은 나를 가만히 띄워 올리고,
스치는 바람 끝에
발끝에서부터 번지는 생의 파문.
빗줄기가 긋는 선마다
나이테처럼 새겨지는 그리움.
눅눅한 저 향기마저 껴안으면
우리의 계절은
이미 눈부신 꽃이 됩니다.
눅눅한 틈에 피어나는 계절
창을 여니 일 년의 절반을 통과한 습기가 낮은 곳부터 조용히 고여 든다. 어제의 나는 마른 것들만을 쥐려 애썼으나, 정작 생의 깊이는 이 눅눅한 틈새에서 피어났다. 빗소리가 낡은 지붕을 두드릴 때마다 마음의 빗장을 조금씩 푼다. 이제야 비로소, 젖어들어야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장독의 뚜껑을 닫고 기다리는 일은 고통이 아니라 인내라는 이름의 발효였다. 성급히 볕을 찾아 달아나던 어제의 나를 잠시 멈춰 세운다. 빗줄기가 긋는 선마다 내 삶의 굽이진 마디들이 새겨진다. 어떤 아픔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견뎌낸 시간만큼 몸속 깊이 스며들어 단단한 나이테가 된다. 강아지풀이 폭우 속에서 제 몸을 굽히고도 부러지지 않는 것은 억지로 버티지 않고 흐르는 물길을 제 살결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바람이 벤치 끝을 흔들고 지나갈 때, 코끝을 스치는 흙냄새. 비를 오래 머금은 땅에서만 올라오는 냄새였다. 어제쯤의 귀퉁이를 맴돌던 나비 한 마리도 젖은 잎 아래 날개를 접었다. 나도 창가에 기대어 한동안 빗소리를 들었다. 마르지 않은 오후가 방 안으로 천천히 스며들고 있었다.
견뎌낸 막막함도 오래 비를 머금은 흙과 닮아 있었다. 초록 잎사귀는 쏟아지는 비를 끝내 밀어내지 않았고, 한층 짙은 빛으로 마당을 채웠다. 눅눅했던 시간도 그렇게 조금씩 제 빛을 찾아가고 있었다.
오늘도 계절은 말없이
나이테 하나를 더한다.
창밖으로 비가 쏟아지던 날이었습니다. 눅눅한 방 안을 채우던 비 냄새가 오래 머물러, 창도 닫지 못한 채 한참을 앉아 있었습니다. 마른 것들과 환한 것들만 바라보며 지나는 날이 많았는데, 비를 머금은 흙과 젖은 잎사귀를 바라보다 보니 오래 남는 것은 늘 그런 시간들이었습니다.
억지로 버티지 않고 흐르는 물길은 끝내 제 길을 만들었습니다. 어떤 시간은 떠난 뒤에도 한 사람 안에 오래 남아 있습니다.
오늘이 조금 눅눅하고 무겁더라도, 그 시간도 오래 비를 머금은 흙처럼 제 자리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여름도 그렇게, 저마다의 향기를 품으며 깊어집니다.
비를 다 맞은 잎은 더 푸르렀습니다. 흙은 젖은 냄새를 오래 품고 있었고, 장독은 저녁이 올 때까지 물기를 놓지 않았습니다.
마르지 않은 시간도 그렇게 한 계절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사람도 그런 계절을 지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오늘도 계절은 아무 말 없이 나이테 하나를 더 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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