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이성(Staatsräson)이란?

byAltusSolum

Altus Solum에 매일 글을 쓰면서 '바카라임'만큼 많이 강조한 단어는 아마 '국가이성'일것이다. 국가가 마땅히 갖춰야 할 전략적 합리성을 촉구할 때마다, 나는 이 단어 옆 괄호 안에 '레종 데타(Raison d'État)'를 적어 넣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대중과 언론에 더 익숙하게 통용되는 프랑스식 조어를 전략적으로 차용한 것이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 내가 진정으로 옹호하고 우리 시스템에 이식하고자 했던 것은 프랑스식 실전 외교의 야성이 아니다. 피비린내 나는 역사적 참회를 거치며 독일 일반 국가학(Allgemeine Staatslehre)의 용광로 속에서 차갑고 정교하게 제련된 헌법적 이성, 바로 '슈타츠레종(Staatsräson)'이다. 작금의 마비된 국가 컨트롤타워를 복원하기 위해, 우리는 이 개념이 400년의 역사를 거치며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 그 거대한 계보를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 국가이성의 탄생과 진화: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고 미국

국가이성의 씨앗을 맨 처음 뿌린 것은 16세기 이탈리아의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1469-1527)였다. 그는 정치를 종교적 도덕의 굴레에서 완벽하게 분리하며, 국가 생존을 위해서라면 군주는 선하지 않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냉혹한 통치술을 역설했다. 이어 조반니 보테로((Giovanni Botero, 1544-1617)가 국가의 유지와 팽창을 위한 이 고유의 규범에 '라조네 디 스타토(Ragione di Stato)'라는 이름을 붙이며 철학적 뼈대를 세웠다. 마키아벨리가 '내용물(국가 생존을 위한 냉혹한 통치술)'을 창조했다면, 후대의 보테로가 거기에 '국가이성이라는 이름을 붙여 정치학의 공식 용어로 데뷔시킨 셈이다. 이처럼 지성의 역사에서도 누군가 씨앗을 뿌리면, 누군가는 열매로 구체화한다.


이 맹아적 개념을 바카라 밖으로 끌어내어 실전 외교의 피비린내 나는 무기로 완성한 것은 17세기 프랑스의 리슐리외 추기경( (Armand Jean du Plessis de Richelieu, 1585-1642)이었다. 그는 루이 13세 치하의 수석 재상(Chief Minister)으로서 사실상 17세기 초반 프랑스의 국가 권력을 통째로 쥐고 흔든 일인자였다. 영국의 역사가 C.V. 웨지우드(Cicely Veronica Wedgwood, 1910-1997)가 <30년 전쟁>에서 적나라하게 묘사했듯, 당시 전 유럽은 가톨릭과 개신교로 나뉘어 맹목적인 살육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가톨릭 추기경이었던 리슐리외는 과감히 종교적 가치를 버리고 개신교 국가들과 동맹을 맺는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포위망을 뚫고 프랑스라는 '국가의 생존과 패권'을 쟁취하기 위함이었다. 신념보다 국가 이익이 절대 우위에 있음을 증명한 이 권력정치(Realpolitik)의 순간이 바로 '레종 데타(Raison d'État)'의 역사적 폭발이다.


현대의 미국은 이 철학적 개념을 '국가 이익(National Interest)'이라는 직관적이고 현실주의적인 언어로 번역하여 세계 패권을 유지하는 제1원리로 삼고 있다. 어제 살펴본 모레노 미 상원의원과 마스트 하원 외교위원장의 행보는 21세기판 리슐리외의 귀환으로 볼 수있다. <30년 전쟁> 당시의 숭고한 가치가 '종교'였다면, 현대 국제정치의 가장 숭고한 가치는 '자유민주주의 안보 동맹'이다. 그러나 미국은 그 동맹의 가치를 훼손해서라도 자국 기업(쿠팡)과 첨단 공급망(반도체·조선)의 이익을 관철하려 들고 있다. 미국식 국가이익이 작동하는 이 냉혹한 현실 앞에, 대한민국은 지금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 독일의 제련: 야만에서 헌법적 보호 의무로

프랑스의 레종 데타나 미국의 내셔널 인터레스트는 자칫 '국가 생존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맹목적 폭력'으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 이 맹목성을 통제하고 '학문적 이성'으로 장교하게 완성한 곳이 바로 독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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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법학이나 정치학을 공부하는 모든 학생들은 1학년 1학기부터 <국가학((Allgemeine Staatslehre)>이라는 과목을 배운다. 헌법 조문을 펴기 전에 "국가란 무엇인가", "주권은 어디서 오는가"를 집요하게 묻는 이 학문적 훈련이 바로 독일 공법의 심장이다. 독일의 헌법(Staatsrecht) 체계는 철학적 주춧돌인 이 <국가학> 위에, 국가 권력의 분립과 작동 룰을 설계한 '국가조직법(Staatsorganisationsrecht)', 그리고 그 권력으로부터 개인을 방어하는 '근본권(Grundrecht)'**이 양대 기둥으로 결합하며 비로소 완벽한 건축을 이룬다.


** 현재 한국에서는 Grundrecht를 흔히 '기본권'이라 번역하지만, 나는 이 글에서 의도적으로 '근본권'이라 명명했다. 평소 단어의 오염을 우려하는 입장으로서, 나는 '평화', '자유', '기본'이라는 단어의 정치적 호도를 각별히 경계해왔다. 독일어 'Grund(뿌리, 토대)'가 가진 무게를 '기본'이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독일 헌법의 공식 명칭 자체가 'Grundgesetz(기본법)'으로 불리우는 상황에서, Grundrecht까지 '기본권'이라고 칭하면 불필요한 개념적 혼동을 줄 수 있어 이를 명확히 분리했다. 현재 언론의 기고문을 보면 글의 맥락에 의해 달리 쓰여야하는 헌법의 개념인 Verfassung과 Staatsrecht의 층위를 구분없이 혼용하는 실정이다.

하지만 법전인 '기본법(Grundgesetz)'과, 거대한 국가 권력에 맞서는 개인의 실체적 방어막인 '근본권(Grundrechte)'은 엄연히 다른 차원의 개념이다. 언어의 엄밀함이 무너지면 국가를 지탱하는 사유의 뼈대도 함께 무너지는 법이다.


독일 공법학계의 마이스터인 요제프 이젠제(Josef Isensee, 1937-) 교수님께서는 늘 수업에서 법 조문의 기술적 해석보다 '자세와 태도'를 강조하셨다. 국가라는 거대한 괴물(리바이어던)을 어떻게 통제하고 운용할 것인지 늘 겸손한 자세로 접근해야 한다고, 철학적 '벽돌'을 쥐고 차근차근 쌓아올려야 현실을 제대로 다룰 수 있다고 강조 하셨다.


전후 독일 헌법학의 제1원리가 명시하듯 "인간이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Der Staat ist um des Menschen willen da)." 그러나 이젠제 교수님께서는 동시에 이 숭고한 원리가 몽상으로 끝나지 않기 위한 한 가지 엄중한 조건을 달았다.


"국가 없이 안전 없고, 안전 없이 자유 없다

(Ohne Staat keine Sicherheit, ohne Sicherheit keine Freiheit)."

<자유로운 헌법국가의 보호 의무 (Schutzpflichten des freiheitlichen Verfassungsstaates, 1983)>


즉, 국가는 대내외적 위협으로부터 헌법적 가치와 국민을 수호할 차갑고 강력한 의지, '국가이성(Staatsräson)'을 가져야만 한다. 이젠제 교수님께서 주창한 현대적 의미의 국가이성은 권력자의 사익을 위한 권모술수가 아니다. 거대한 지정학적 위기 앞에서도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국가의 모든 권력과 레버리지를 동기화하여 국민의 헌법적 주권을 수호해 내는 '고도로 계산된 전략적 합리성'이자 '국가의 절대적 보호 의무(Schutzpflicht)'로 진화한 것이다.


이 <국가학>은 결코 바카라상물림들의 탁상공론이 아니다. 그것은 독일이 피비린내 나는 역사적 참사와 실패를 통해 뼈저리게 체득한 생존의 기록, 즉 헌법사(Verfassungsgeschichte)와 궤를 같이한다. △1848년 파울스키르헤(Paulskirche) 헌법의 좌절, △1919년 가장 민주적이었으나 스스로를 방어하지 못해 무너진 바이마르(Weimar) 헌법, 그리고 △1933년 법의 외피를 쓴 나치 시대의 절대적 야만까지. 제2차 세계대전의 폐허 위에서 △1949년 본(Bonn) 헌법(Grundgesetz: 기본법)을 제정하며 독일 지성계가 획득한 피눈물 나는 교훈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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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censed-image (1).jpg<독일 연방공화국 공로훈장(Verdienstorden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출처: Andreas Rentz



2007년 이젠제 교수님께서 일흔이 되던 해에 독일 정부는 국가의 헌법적 청사진을 제시한 그에게 최고 예우인 '독일연방공로십자훈장(Bundesverdienstkreuz)'을 수여했다. 평생을 바쳐 연구한 <국가학>과 <근본권>, 특히 파울 키르히호프(Paul Kirchhof) 교수님과 함께 총 13권으로 완성한 <헌법 편람(Handbuch des Staatsrechts)>을 통해 전후 독일과 통일 독일의 헌법적 청사진을 훌륭하게 제시한 공로를 국가가 공식적으로 기린 자리였다. 학자는 평생을 바친 자신의 철학으로 국가에 봉사하고, 국가는 그 지적 헌신에 최고의 훈장으로 감사하는 참으로 훈훈하고도 묵직한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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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붕만 수입한 한국의 비극

독일이 자신들의 흑역사를 극복하기 위해 차근차근 묻고 토론하며 쌓아 올린 이 일반국가학의 토대는 오늘날 우리가 거울로 삼을 수 있다. 대한민국은 가장 선진적인 헌법 조문과 제도를 수입하여 화려한 지붕을 올렸지만, 그 제도를 작동시키는 근원적인 철학, 즉 '국가이성'이라는 벽돌을 우리 스스로의 치열한 고민으로 구워낸 적이 없다.


미국이 거대한 '통상-안보 복합 패키지'를 장전하고 압박해 올 때, 우리의 조종석이 완벽하게 마비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가를 유기적인 생명체로 조망하는 <국가학>적인 고민이나 훈련을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이들에게, 국가는 그저 파편화된 행정부의 집합이자 자신이 맡은 법 조문만을 기계적으로 집행하는 공간일 뿐이다. 공정위는 '2억 원짜리 과태료'라는 좁은 법리적 명분에 갇히고, 정치권은 사법과 공권력을 도구화하여 국회 청문회에서 호통을 치는 카타르시스만 소비한다.


거시적 철학 없이 법이나 행정, 정치를 다루는 '영혼없는 기술자'들만 남은 국가의 필연적인 비극이다. 거대한 외부의 파도 앞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외부의 공격 그 자체가 아니다. 반만년 굴곡진 역사를 거치면서도 제련된 '국가이성(Staatsräson)'이 우리 시스템 내부에 단 한 조각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법은 존재하되 국가는 실종되었다. 부처 간 칸막이에 갇혀 바카라임 회피에 급급한 관료제와 정치 기술자들에게 이 나라의 운명을 계속 맡겨야 할까? 대바카라 없이 맞이한 이 거대한 참사를 돌파하기 위해 우리에게 지금 가장 절실한 것은, 잃어버린 국가의 조종석을 복원하고 '국가이성(Staatsräson)'을 되찾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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