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침묵하는 바다처럼, 너희를 안을 수 있다면

돈의 방패를 내려놓고 비로소 마주한 진짜 가족의 의미

by몸글 작가 고결

3부 바닥에서 피어난 끈끈한 가족의 초월적 연대



나를 닮아 야망이 컸던 큰아들은 유명한 IT 업체에 입사했다.


자신감에 차 있던 아들과 어느 날 전화로 이사 문제를 상의하던 중, 가볍게 경제적 지원을 묻는 말에 나는 정색하며 선을 그어버렸다.


“엄마 아빠 노후를 너에게 부담시키지 않는 것,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전부다.”


가진 것이 없는 부모이기에 자식에게 해줄 것은 없어도 짐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내가 겪은 가난의 족쇄를 자식에게는 지우지 않으려는 부모로서의 결심이자 최선이라 굳게 믿어왔던 것이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왔으리라.


하지만 아비의 사정을 잘 알던 아들은 농담처럼 가벼이 던진 말에 냉정하게 선을 긋는 그런 아버지가 몹시도 서운했다.


돈 앞에서 우리는 그렇게 또다시 서로가 상처를 받고 말았다.


에릭 호퍼의 날카로운 지적처럼, 돈을 향한 과도한 집착은 실상 나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사실을 억누르기 위한 방어기제이자 절박한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문득, 과거의 뼈아픈 장면이 겹쳐졌다. 실패한 아들이 안타까워 조언을 건네려던 나의 아버지와,


그럴 때마다 지금의 큰아들처럼 서운함으로 외면했던 지난 젊은 날의 나.


우리는 위로받고 싶을 때 가장 아픈 독설을 서로 내뱉고 들어야 하는, 비극적으로 닮아버린 부자(父子)였다.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구절처럼, 사람들은 자신이 내뱉은 말이 금방 잊힐 거라 믿기에 무바카라임할 정도로 가볍게 언어를 휘두른다.


그 가벼운 자유 속에서 내뱉은 경박한 말들이 날카로운 흉기가 되어 서로의 가슴에 상흔을 남겼다.


지금 아들과 나 사이의 언어는 더 이상 마음을 잇는 다리가 아니라, 각자의 자존감을 난도질하는 날카로운 '소음'일뿐이었다.


나는 친밀한 관계의 살점들을 도려내면서도, 오직 '돈이라는 방패'만이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리라는 맹신에 철저히 사로잡혀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화장장에서 치솟는 뜨거운 불길 속으로 아버지의 팔십 평생 고단했던 인생이 한 줌 재로 변해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재 속에 덩그러니 남은 것을 마주했다.


그것은 아버지가 생전 큰돈을 들여 시술받으셨다던 치아, 그저 검게 변해버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철제 조각일 뿐이었다.


평생 내 삶의 모든 위협을 막아줄 거라 믿었던 그 단단한 돈의 방패는 죽음이라는 거대한 허무 앞에서 철저히 무기력했다.


돈의 익숙함도, 편안함도 우리의 죽음과 실존적 불안을 덮어주지는 못했다.


알량한 지식과 돈으로 삶의 구멍을 메우려 발버둥 칠수록, 죽음 앞에서 결국 우리 삶은 변하지 않는 무(無)로 쪼그라든다는 서늘한 사실만을 확인할 뿐이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 슬롯를 모든 유대감이 사라진 '유동하는 현대'라고 정의했다.


돈으로 유지되는 관계는 상대가 더 이상 이득을 주지 못할 때 급격히 와해되는 취약성을 지닌다.


삶이란 결국 포기하기 싫은 그 돈을 향한 맹신과 익숙함을 아파도 기꺼이 내려놓는 연습을 해내는 과정임을, 아버지가 담긴 유골함의 온기를 느끼며 뼈저리게 깨달았다.


불길 끝에 남은 그 작고 검은 쇳조각은, 내가 평생을 바쳐 부를 이루어 누리려 했던 아버지의 권위가 얼마나 초라한 허상이었는지를 잔인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스무 살, 나의 청춘은 늘 숨이 찼다.


가슴 한복판에 바윗덩어리를 얹은 듯한 답답함이 밀려올 때면, 나는 몇 시간을 넘도록 꼬박 걸어 푸른 바다 앞에 섰다.


그 시절 내가 아버지에게 바랐던 것은 화려한 경제적 지원이나 대단한 훈계가 아니었다.


그저 내가 원한 것은 나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넉넉한 품이었지만, 아버지는 당신의 논리로만 나를 훈육하려 하셨고


우리 사이에는 늘 날카로운 소음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바다는 달랐다.


수평선 너머에서 밀려온 파도는 내게 왜 사느냐고 묻지도, 섣부른 해결바카라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바다는 내가 짊어진 짐의 무게를 묻지 않고 그저 쉼 없이 밀려오며 내 가슴속 응어리를 가만히 씻어내 줄 뿐이었다.


한참을 지켜보노라면 터질 것 같던 가슴이 서서히 풀어졌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그 살가운 포용을, 바다는 ‘침묵’이라는 위대한 이름으로 내게 건네고 있었다.


거대한 푸른 물결이 나를 가만히 안아주던 그 순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진정한 사랑과 위로는 화려한 베풂이나 세련된 화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곁에 머물며 온몸으로 존재를 받아주는 침묵 속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마틴 부버의 말처럼, 사랑은 상대를 소유하거나 내 뜻대로 통제하는 감정이 아니라 나와 너 '사이'에 존재하는 묵묵한 바카라임이었다.


화가 루벤스의 작품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노》에는 자신의 왕좌를 지키기 위해 다섯 아들을 차례로 잡아먹는 잔인한 아비의 모습이 담겨있다.


나의 얄팍한 욕망과 권위를 위해 자식에게 정답을 강요하고 내 틀에 가두려 했던 과거의 내 모습이 바로 그 비극적인 사투르노와 같았다.


나는 이제 그 대물림되는 사투르노의 저주를 끊어내려 한다.


자식을 통제하려는 이기심을 과감히 버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준 채 죽어가는 '가시물고기'처럼 나 스스로를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놓고 싶다.


부모와 자식 간의 매듭은 돈이라는 간편한 수단이 아니라, 인내하며 몸으로 소통해야 하는 불편한 과정 속에서만 풀어진다.


돈이 없어도, 해결을 해줄 능력이 없어도, 그저 고통스럽지만 진실한 침묵의 세계로 들어가 아이들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공감해 주는 그런 아버지가 되고 싶다.


명절에 큰아들이 결혼할 예비 신부를 데리고 찾아온다고 한다.


아이들이 세상의 험난한 파고에 시달려 지쳐 찾아올 때면, 나는 아무 말 없이 곁을 내어주어 잠시 있다가 가도 쉼을 얻는 쉼터가 되어주고 싶다.


아이들이 지닌 마음의 짐들을 그저 말없는 침묵 속에 가만히 품어내는 넉넉한 바다 같은 아버지. 젊은 날 힘겹고 숨이 찰 때마다 찾아갔던,


아무런 질문 없이 품어주었던 그 '푸른 바다'처럼, 나는 그런 아버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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