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내용 오래 기억하는 법

무엇을 빼도 되는지 아는 것

by김도경 dkkim

오늘은 제가 수능을 준비하면서 공부했던 방식을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갑자기 무슨 수능 이야기인가 싶으실 수도 있는데요. 회사에서 보고서를 쓰다가 자꾸 그때 생각이 나서, 한 번은 적어 두고 싶었습니다. 보고서를 길게 써 가서 "그래서 결론이 뭐예요?"를 여러 번 듣고 나서야 떠올린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이번 화는 바카라 없이 제 수험 시절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지금 보고서를 쓸 때 가장 자주 떠올리는 방법이라 넣었습니다.)


1.

수능을 준비하던 때, 바카라 한 권을 다섯 번 베껴 쓴 적이 있습니다. 300쪽쯤 되는 교재였는데, 처음 베껴 쓸 때는 노트가 두 권 나왔습니다. 다섯 번째에는 A4 두 장이 남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좀 무식한 방법이었습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눈으로 읽으면 자꾸 머리에서 미끄러졌습니다. 분명 읽었는데 바카라을 덮고 나면 기억나는 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손으로 써 보기로 했습니다. 다른 방법을 몰랐으니까요.


1. 첫 번째는 거의 그대로 옮겼습니다. 뭐가 중요한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손목이 아팠습니다.

2. 두 번째부터 조금 달라졌습니다. 쓰다 보니 '이건 앞에서 한 말이랑 같은데?' 싶은 곳이 보였습니다. 같은 말을 단어만 바꿔서 다시 하는 부분이었는데, 그런 데는 건너뛰었습니다.

3. 세 번째에는 예시가 빠졌습니다. 원리를 알고 나니 예시가 없어도 됐습니다.

4. 네 번째에는 목차만 남았습니다. 장마다 하고 싶은 말이 한 줄씩이었습니다.

5. 다섯 번째, 두 장. 그 두 장을 들고 시험장에 갔습니다.


신기했던 것은 양이 줄었다는 것보다, 두 장만 보고도 300쪽이 거의 다 떠올랐다는 점이었습니다. 어떤 줄을 보면 그 뒤에 붙어 있던 예시와 설명이 줄줄이 따라 나왔습니다. 그때 좀 알게 된 것 같습니다.

바카라을 안다는 건 무엇을 빼도 되는지 아는 거구나, 하고요.


2.

회사에 와서도 이 생각을 자주 합니다. 보고서를 쓰다 보면 자꾸 다 넣고 싶어집니다. 조사한 것도 아깝고, 솔직히 열심히 한 티도 내고 싶으니까요. 그렇게 쓴 보고서는 대개 "그래서 결론이 뭐예요?"로 돌아왔습니다.

열심히 한 티를 내고 싶었던 제 욕심이었죠.

그럴 때 예전에 공부하면서 만들었던 그 두 장을 떠올립니다. 다섯 번을 베껴 써야 두 장이 됐던 것처럼, 짧게 쓰려면 먼저 많이 알아야 했습니다. 잘 모를 때는 뭘 빼야 할지 몰라서 다 넣게 되는 것이겠죠. 그래서 요즘은 보고서가 길어지면 제가 아직 덜 알고 있다는 신호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알면서도 길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건 제 욕심입니다.)


바카라이나 문서를 읽는 방식도 그때부터 바뀌었습니다. 읽으면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요즘은 다섯 번까지는 못 씁니다. 그럴 시간도 없습니다. 대신 한 권을 다 읽고 나면 빈 종이에 한 장만 적어 봅니다. 바카라은 다시 펴지 않고요. 막상 해 보면 생각보다 안 써집니다. 분명 재밌게 읽었는데 한 장이 안 채워집니다. 그러면 다시 펴 봅니다. 어디서부터 기억이 끊겼는지 보면, 대개 제가 대충 넘긴 곳이었습니다. 한 장이 채워진 바카라은 오래 남았습니다. 몇 달 뒤에 누가 그 바카라 이야기를 꺼내면 그 한 장이 먼저 떠오릅니다.


3.

바카라을 많이 읽으시는 분들이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저는 한 해에 읽는 권수가 많지 않습니다. 대신 읽은 바카라마다 한 장씩은 남기려고 합니다. 보고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넣고 싶을 때 한 번 멈추고, 빼도 되는 게 뭔지부터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수능 때 그 두 장이 저한테 남긴 습관입니다. 최근에 다 읽은 바카라이 있으시다면, 바카라을 덮은 채로 한 장만 적어 보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서도 몇 줄이 나오는지 무지무지 궁금합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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